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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를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힘- 2010년 9월 26일 주일 (에베소서 4)

글쓴이 : 최고관리자 날짜 : 2013-09-13 (금) 05:32 조회 : 1481
2010년 9월 26일
 
관계를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힘
 
본문구절: 에베소서 2장 11 -22절
학습구절: 에베소서 2장 11 -22절
 
성경진리: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의 일원이 되며 다른 성도들과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된다.
 
지난 주의 성경공부는 개인의 구원교리에 초점이 맞추어 지고 있다.
우리들 각자는 하나님의 은혜의 수혜자들이다.
에베소서 2장 8절의 말씀대로,
우리는 개별적으로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을 얻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는 것은 사람들 각자가 개별적이고도 직접적인 방법으로 체험하는 일이다.
결코 집단적인 어떤 결정이나 다른 사람이 대신해서 얻어질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전적으로 믿음의 통로를 통해 각 개인에게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은혜는 믿는 자들의 관계에 속에서 나타나며 큰 영향을 끼친다.
구원받은 자들은 구원받기 이전과 다른 관계의 삶을 살게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독불장군’식의 신자로 구원해 주신 것이 아니라,
‘신앙공동체’를 이루어 살도록 불러주셨다.
이번 주간의 학과는 구원을 받은 신자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는 물론
성도들 서로가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야 하느냐에 대한 교리(‘가르침’)에 초점이 맞추어 지고 있다.
가장 중요한 것으로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성도들은 함께 모여
“하나님의 가족”이 되고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1세기 당시에 그것은 불가능하게 보이는 일인 동시에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간단하게 몇 가지만 예로 들어보면,
당시에 그 말은 유대인과 이방인이, 종들과 자유자들이, 노예와 주인이, 여자와 남자가
하나님의 똑같은 자녀들로 교회 안에서 한 형제와 자매로 서로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 노예들은 인간으로 대우를 받은 것이 아니라, 노동의 방편과 수단으로 취급한 것을 생각하면,
비록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 할지라도 그들을 한 가족처럼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을지는 상상하고도 남는다.
하나님의 힘이 없이는 그같은 관계의 변화가 불가틍하다는 사실을 짐작케 된다.
오늘 날에도 사람들은 인종적인 차별이나 계층간의 갈등, 혹은 불신과 편견등으로
서로 경원하며 질시하는 경우가 많다.
이번 주간의 학과는 그같은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관계의 변화를 이루도록 도전해 주고 있다
 
가까워 지다 (에베소서 2장 11 -13절):
11- 13절은 사도 바울이 특별히 이방인 신자들을 대상으로 삼아 말한 내용이다.
바울은 그들을 “너희’라는 말로 불렀다.
바울은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믿기 이전의 상태를 생각해 보도록 요구하였다.
우리는 가끔씩 믿기 이전의 자신의 모습을 돌이켜보면 믿음의 감격과 기쁨이 새로워지고
은혜와 감사가 마음에 가득 넘쳐날 때가 많다.
그래서 바울은 이방인들이었던 그들에게 ‘구원받기 이전의 생활이 어떠했었는지를 다시 살펴보라고 하였다.
‘그 때에’ 그들은 ‘이방인’이었다.
바울은 먼저 유대인과 이방인들의 소원했던 관계와 차이점을 들어
이방인들이었던 성도들로 하여금 믿기 이전의 상태를 새로운 각도에서 바라보게 하였다.
유대인 남자들은 ‘할례’를 받았는데, 그것은 아부라함의 자손이자 ‘언약공동체’의 일원이 된 외적인 표가 되었다.
이를 자랑스럽게 여긴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할례당”으로 부르고
이방인들은 “무할례당”으로 부르며 멸시했다.
그들 두 그룹의 적대심은 매우 강했다.
어떤 유대인들은 심지어 이방인들은 지옥의 인구를 늘리기 위해 세상에 타어났다고 생각하였다.
그같이 취급받은 이방인들의 유대인들에 대한 적대감은 커질 수 밖에 없었다.
어떻게 하면 그같이 적대적인 두 그룹의 사람들이 가까워질 수 있었을까?
이방인들의 불리한 상태는 인종적인 차별이나 외적 편견에만 극한 된 것이 아니었다.
바울은 유대인들이 누렸던 영적인 특권들을 열거함으로
영적인 면에서도 이방인들이 불리한 입장에 처해 있었던 사실을 설명하였다.
구원을 받기 전에 이방인들은 ‘그리스도’와 아무 상관이 없었다.
반면에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와서 공의로 세상을 다스리게 될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같은 사실은 성경에 분명하게 예언되어 있다.
복음서를 보면, 많은 유대인들이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처음에 예수님을 쉽게 받아들였던 사실을 찾아볼 수 있다 (요 1: 41, 눅 2: 25 -33).
헬라어인 ‘그리스도’와 히브리어인 ‘메사야’는 같은 뜻의 말로 ‘기름부움을 받은 자’를 지칭한다.
이방인이었던 그들은 또한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에 들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없었고 약속의 언약들도 없었으며 아무 소망이 없이 살았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는 이방인들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그들은 복음을 듣기 전까지는 그같은 사실을 알지 못하고 살았다.
그래서 그들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었고 유대인 성도들과도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그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과는 물론 성도들 끼리도 가까워졌다.
성도들은 하나의 신앙공동체를 이루게 되었다.
인종이나 언어 혹은 계층같은 인간적인 차이점들은 계속 존재할지라도,
그같은 것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를 이루는 성도의 새로운 교제에 비교해 볼 때 아주 하찮은 것들이다.
 
함께 연결되다 (에베소서 2장 14 -18절):
이 단원에서 바울은 ‘너희’로 지칭한 이방인 신자들과 ‘우리’로 지칭되고 있는 유대인 신자들 모두에게 말하고 있다.
그는 이들 두 그룹이 어떻게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으로 함께 연결되었는지를 설명하였다.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은 원수관계로 서로 갈라져 있었다.
그런데 ‘우리의 화평’이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희생제물로 죽으심으로 그들 두 그룹을 하나로 만드셨다.
바울은 주님이 ‘중간에 막힌 담’을 헐어주셨기 때문에 그같이 된 것으로 설명하였다.
‘중간에 막힌 담’은 예루살렘 성전에 있던 담을 가리키는 것으로,
유대인들의 뜰과 이방인들의 뜰을 갈라놓는 기능을 했다.
만일 이방인들이 규정을 무시하고 유대인들의 뜰에 들어갈 경우에는 처형을 당할 수도 있었다.
그러니까, ‘중간에 막힌 담’은 사람들을 갈라놓는 모든 장애물들을 대표하는 상징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유대인 그룹과 이방인 그룹은
서로 갈라져서 반목하며 싸우는 세상의 모든 그룹들을 대표했던 것이다.
평화의 왕으로 오신 주님은 십자가로 ‘원수된 것’을 소멸하시고
자기 안에서 하나의 새 사람을 지으셔서 화평을 이루게 하셨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새 사람을 만들었다’ 혹은 ‘한 몸으로 만들었다’는 말은
모든 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연합’ 혹은 ‘연결’ 된 것을 뜻한다.
우리는 화평의 주님께서 허물어뜨리신 미움과 적대 및 편견의 담들을 다시 세우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과의 관계면에서 볼 때,
구원의 복음을 듣기 이전의 이방인들은 ‘먼 데 있는’ 자들이었다.
반면에 유대인들은 ‘가까운 데 있는 자’들이었다.
우리의 화평이 되시며 화평을 이루시는 분이신 그리스도께서 두 그룹 모두에게 ‘평안을 전하셨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들 두 그룹은 이제 “한 성령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되었다.
‘나아감을 얻다’라는 말은 왕의 보좌 앞으로 나갈 수 있는 특권을 뜻한다.
18절에서 성부, 성자, 성신의 삼위 하나님이 언급되고 있는 것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모든 신자들은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한 성령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께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러므로 믿음의 성도들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라고
히브리서 기자는 성도들에게 권하였다(히 4: 16).
 
함께 지어져 가다 (에베소서 2장 19 -22절):
이방인 신자들은 이제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되었다.
바울은 ‘성전’ 혹은 ‘가족(권속)’등의 여러 다른 용어들을 사용하여
성도들이 하나님과 그리고 다른 성도들과 맺고 있는 관계가 어떤 성격의 것인지를 설명하였다.
이전 처럼, 19절의 “너희가”라는 말은 이방인을 가리키고 있다.
바울은 그들이 더 이상 외국 사람이나 나그네가 아니며 성도들과 함께 시민이자 하나님의 가족임을 밝혔다.
바울은 특별히 건축 용어를 사용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지어져 가는 새로운 신앙공동체를 건축중에 있는 웅장한 성전에다 비겼다.
새로 지어져 가는 하나님의 건물의 기초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이다.
주님은 특별히 그들을 부르셔서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게 하시고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게 하심으로
교회의 기초를 튼튼히 놓게 하셨다.
이 신령한 건물의 “모퉁이 돌’은 단연 “그리스도 예수”이시다.
당시의 건축양식을 알면 모퉁이 돌이 건물에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모퉁이 돌은 ‘기초 돌’ 혹은 ‘머릿 돌’로도 불려졌는데,
그것은 건물을 바르게 세워주고 함께 붙들어주는 역할을 하였다.
시편 118편 22절과 이사야서 28장 16절 그리고 베드로전서 2장 4- 7절의 말씀을 읽으면
예수님이 ‘모퉁이 돌’이 되시는 일에 대해 더 깊은 이해를 얻을 수 있다.
성도들은 ‘산 돌’들로 서로 맞추어지고 쌓아져서 ‘성전’으로 지어지고 있다.
바울은 이방인 성도들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성전으로 지어져 가고 있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었다.
믿는 자들은 개별적으로 구원을 받지만, 우리는 곧 더 큰 신앙공동체의 일원이 된다.
그리스도인들은 함께 성전으로 지어져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거하시는 처소가 된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세상에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