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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화목 - 제 4과 - 2019년 9월 22일 주일 장년성경연구 - 에베소서 2장 11 -22절

글쓴이 : 강호길 날짜 : 2019-09-16 (월) 10:24 조회 : 78

장년성경연구 교사용 교안

2019년 9월 22일 주일 용  


제 4과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화목       



학습구절: 에베소서 2장 11 -22절


성경진리: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신자들의 사이를 갈라놓고 있는 적개심의 장벽을 제거해 주신다.


주요교리 교 회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모든 나라와 인종과 언어에서 오는 모든 계층과 연령층의 구속 받은 신자들은 그 몸의 지체가 된다 (계 7: 9-10).


암송구절:  에베소서 2장 14절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For he himself is our peace, who has made the two groups one

and has destroyed the barrier, the dividing wall of hostility.”           



시작하는 글:


종종 갈등과 분열의 골은 깊게 파인다.

더구나, 과거에 받은 상처들과 현재의 두려움, 혹은 앞으로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에 대한 상상력은 갈등과 분열을 더 깊게 그리고 더 복잡하게 만들 수 있다.

그 같은 복잡성에 더하여, 사람들은 한편으로는 좋은 관계를 나타내 보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계속 나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스포츠 팀들이나 공동 목표를 가진 일들, 혹은 지역사회의 행사들이나 프로그램 등은 다양한 그룹이나 사람들을 하나로 모을 수 있다.

 그렇다고 그것이 그 전부터 존재하는 나쁜 관계를 바로 잡아주거나 적대감을 제거시켜 주는 것은 아니다.

진정한 화목과 연합은 함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이루어 질 수 있다.


지금까지 목격한 것 중에 사람들을 갈라놓는 가장 큰 장벽들을 든다면 어떤 것들이 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사람들이나 그룹들 사이에 분열을 일으키는 근본적인 문제점들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본문배경설명


에베소서 2장 11절부터 22절까지


처음 두 과에서 우리는 바울이 그의 서신의 수신자들을 위해 기도한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우리는, 제 3과에서는, 구원의 본질(本質)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을 살펴보았다 (2: 1 -10).
그들 구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것을 통해 신자들이 영적 죽음에서 영적 생명으로 변화되었다고 선언하였다.
구원은 죄인들에게 주시는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선물 (은혜)이며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받을 수 있다.

바울은 신자들이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것은 하나님께서 미리부터 항상 계획하고 계신 것으로,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한 일을 행하는 것이 그 목적이 되고 있음을 상기시켜 주는 것으로 구원의 본질에 대한 그의 가르침을 마쳤다.

제 4과의 학습구절에서, 바울은 신자들이 서로 관계를 맺는 관점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새로운 삶의 신학적 의미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방인 신자들은 그리스도를 믿기 이전에는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었다 (2: 12).

사람들은 오랫동안 통치력, 언어, 문화, 영토 등을 중심으로 하여 여러 그룹으로 서로 분리되어 왔지만, 유대인과 이방인이라는 인종적인 구별과 분리만큼 예리하고도 추한 것은 없었다.

성경의 첫 번째 책인 창세기는 하나님께서 아브람이라는 사람을 (후에는 아브라함으로 알려짐) 부르셔서 그와 언약을 맺으신 일을 밝혀주고 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수많은 후손들과 그들이 살 수 있는 땅으로 축복하겠다고 약속하셨다.

더욱이, 하나님은 “땅의 모든 족속이” 이 언약의 백성으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창 12: 1 -3).

하지만, 이스라엘로도 알려진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수 세계에 걸쳐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전반적으로 무시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백성으로서 자신의 위치를 잘못 해석했으며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이방인들을 무시할 뿐 아니라, 경멸적인 태도로 대하였다.

그 적대감은 상호간의 것으로, 원수가 되었다.  

예수님 당시에, 많은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에 대해 그 같은 악감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지옥 불에 연료를 공급할 목적으로 지으셨다고 믿기까지 하였다.

1 세기 당시에,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사이의 분리 현상을 보여준 하나의 극적인 상징은 예루살렘의 성전 뜰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예루살렘 성전 뜰은 이방인들이 모일 수 있는 “이방인 뜰”과 유대인들이 들어갈 수 있는 “안 뜰”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그것은 돌담으로 막혀 있었다.

그 돌담에는 이방인들에게 죽음의 고통을 당하지 않으려면 성전 안뜰에 들어가지 말라고 경고한 경고문들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 같은 한 경고문이 19세기 후반에 예루살렘에서 일하던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굴되었는데, 그것은 터키 이스탄불에 있는 한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 2장 14절에서 “[예수님이]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라고 기록했을 때 어쩌면 그는 성전 뜰의 담을 생각했을 수도 있다.

이 과에서, 우리는 바울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허물어진 두 개의 적대적인 담에 대해 가르치고 있는 것을 살펴보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허물어 버리신 한 가지 적대와 분리의 벽은 (구원의 관점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을 갈라놓는 것이 되고 있다 (2: 14).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소멸”하신 또 다른 적대와 분리의 벽은 (더 중요한 것으로) 죄 많은 인간과 거룩한 하나님 사이의 벽이 되고 있다 (2: 16).   

바울은 그 같은 적대와 분리는 하나님의 계획과 사역에 의해 교회 안에서 이루어 지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2: 21-22).


하나님과 가까워지다 (에베소서 2장 11-13절)


바울은 이방인 신자들에게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 받기 전에는 희망이 없었고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었던 사실을 상기시켰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님과 가까워졌(다).”


2장 11절


●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구원은 에베소서 2 장의 전반부에서 묘사되고 있는 것처럼 사람들의 삶에서 개인적으로 일어나는 일만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인종이나 관습 혹은 언어나 사상 등으로 나뉘지 않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연합되고 하나가 되는 신앙공동체를 창조하는 일을 포함하고 있다.

 바울은 에베소교회 신자들에게 그들이 한 때는 “육체로는 이방인”들이었던 사실을 상기시키는 것으로 그 같은 주장을 시작하였다.

그 것은 그들이 “할례를 받지” 아니하였던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1세기 당시의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이방인들이 유대인의 할례를 비웃고 할례를 행하는 유대인들을 조롱 하였다고 기록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할례를 계속 행하였는데, 이는 그들이 할례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행하도록 명한 것이고 (창 17: 2, 10 -14), 그것은 또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그들의 정체성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놀랍게도, 바울은 그 관습을 우상 숭배의 한 형태로 비난하였다.

바울은 그것을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로 규정하였다.

여기서 사용된 헬라어 단어는 우상을 만드는 것과 관련하여 헬라어판 구약성경에서 사용되고 있다 (레 26: 1, 30; Is. 2: 18; 10: 11; 19: 1; Dan. 5: 4, 23).

유대인들에게 할례는 하나님을 참되게 예배하는데 방해가 되는 또 다른 우상이 되었다.

복음의 시대가 열린 후에,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이루어질 수 있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육체적인 방법으로 맺으려는 시도였다 (엡 2: 1 -10).

유대인들은 (여기서 “할례를 받은 무리”로 지칭되고 있는) 할례를 사용하여 자신들을 이방인들과 분리시켰다,

그러므로, 그러한 벽들은 성경적 진리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육체의 우월성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것은 바울이 부르심을 받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려고 하는 모든 사람들을, 유대인과 이방인을 모두 포함하여, 갈라놓는 벽이 되었다.


2장 12절


●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바울은 그리스도를 믿기 이전의 이방인 신자들의 상태를 네 가지로 설명하였다.

첫째로, 그는 먼저 말하기를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다)”고 하였다.

유대인이 아니었던 그들은 메시야에 대한 기대가 없었다.

그들은 메시야가 와서 죄로부터 그들을 구원해 줄 것에 대한 기대를 하지 않고 있었다.

이방인 신자들의 두 번째 상태는 그들은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들이었다.

이방인들은 로마 시민권의 장점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과 연결되는 것의 이점을 알지 못했다.

출생으로 인해,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었다.

로마서 9 장 3 ~ 5 절에서, 바울은 유대인들의 축복들과 유리한 점들을 열거하였다.

이방인들은 그 같은 축복들과 유리한 점들에 참여하지 못하였다.

바울이 묘사한 이방인 신자들의 세 번째 상태는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었다.

우리는 “언약”이라는 말이 복수로 되어 있는 것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창 15: 7-21), 이삭(창 26: 2-5), 야곱(창 28: 13-15), 다윗 (삼상 7 장)과 같은 사람들과 언약을 맺으셨다.

이방인들은 이 언약의 구성원이 아니었기 때문에 메시야 에 대한 유대인의 희망을 가지지 못하였다.

바울이 마지막으로 언급한 이방인 신자들이 그리스도를 믿기 이전의 상태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들이었다.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우상을 숭배하는 삶을 사는 길을 택하였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 그들에게 계시해주신 진리를 억압하였다 (롬 1: 18-23).

바울이 이방인들의 그 같은 상태를 열거한 것은 이방인들을 낙담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경탄하게 하려는 것이 되고 있다.


왜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삶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하나님의 구원의 일에 경이로움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가?  어떻게 하며 그 같은 것을 방지할 수 있는가?  


2장 13절


●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리스도 밖에서의 이방인들의 심각한 상태를 설명한 후에, 바울은 “이제는”이란 말로 말의
방향을 바꾸었다.
이방인 신자들은 더 이상 소망이 없거나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었다.
그 같은 일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바울은 이방인들을 “전에 멀리 있던” 사람들로 묘사하였다.

바울이 이방인 신자들에게 적용한 표현은 이사야서 57장 19절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사야는 “여호와가 말하노라 먼 데 있는 자에게든지 가까운 데 있는 자에게든지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내가 그를 고치리라”고 하셨다고 하였다.  

하나님의 평강은 유대인들을 가리키는 말인,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미칠 뿐 아니라, “먼데 있는 자”들인 이방인들에게도 미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오셨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함께 불러 모으기에 충분한 힘은 무엇인가?

바울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함께 불러 믿음의 공동체가 생기게 된 것은 “그리스도의 피”의 결과로 돌렸다.

이 새로운 공동체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사건을 통해 태어났으며, 그곳에서 그는 새로운 인류를 하나로 모으기 위해 죽으셨다.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는, 십자가 위에서 자진해서 흘리신 것으로, 그를 믿는 사람들의 죄를 사해주었을 뿐 아니라, 그것은 유대인과 이방인이라는 서로 다른 그룹을 불러모아 하나의 새로운 신앙 공동체로 만들었다.


화목과 화평을 선언하다 (에베소서 2장 14 -18절)


2장 14절부터 18절까지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함께 부르셔서 하나의 새로운 공동체로 만드신 일이 강조되고 있다.
바울은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만 화목과 화평을 이룰 수 있다고 선언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죽음을 통해, 모든 신자들은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고 신자들 서로가 화목을 이루게 되었다.


\2장 14- 15절


●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사도 바울은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는 말로 그리스도께서 적대관계로 살았던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사이에서 “화평”을 이루는 분이 되고 있음을 선언하였다.

예수님은 성도들이 하나님과 그리고 그들 서로가 화평을 이루게 하셨다.

평화는 사람들의 이념이나 종교에서가 아니라, 메시아이신 예수님 안에서 발견되었다.

예수님의 피는 “둘로 하나를” 만들 수 있을 만큼 강하다.

불신(不信)과 때때로 증오(憎惡)가 존재했던 곳에, 예수님은 그들을 하나로 만드셨다.

그는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셨다.

그것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이방인의 뜰과 유대인의 뜰을 나누는 담을 설명하는데 사용 된 것과 같은 단어가 되고 있다.

이방인은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할 유일한 목적으로 이방인의 뜰에까지는 올 수 있었지만, 그 담을 지나갈 수 없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장벽을 허셔서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게 하셨다 (엡 2: 18).


당신의 교회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있는 분단의 벽을 허물려고 하는 영역이 있으면 어떤 곳이 되고 있는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사이를 막고 있던 담을 허무시기 위해, 예수님은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다).”

폐하다”는 말은 또한 ‘비효율적으로 만들다’ 혹은 ‘무력하게 만들다’라는 말로 번역될 수 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키는 것을 구원을 얻는 것의 전제조건으로 욕하였다.

문제는 모든 사람들이 범법자(犯法者)들이라는 사실이다.

아무도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없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보혈의 피를 흘리심으로, 율법의 의로운 요구 사항을 충족시키셨으며, 그렇게 하심으로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사람들 (유대인)과 율법을 모르는 사람들 (이방인)을 함께 모으셨다.

예수님이 율법을 무력하게 만드신 것은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사람이거나 율법에 대해 알지 못하는 사람이거나 간에, 율법의 의로운 요구 사항을 충족하는 유일한 희망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의 희생적인 속죄의 죽음으로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셨다.

그들은 더 이상 유대인 대 이방인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


2장 16절


●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그리스도께서 새로운 인간을 창조하시는 일은 단지 인종 관계를 개선시키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다.

화목의 개념은 서로에게 적대적인 두 당사자를 함께 모으는 것이 되고 있다.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모두가 하나님과의 화목이 필요하였다.

인간의 죄는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켰고 인간들 사이에 적개심을 일으켰다.

죄 많은 인간과 거룩한 하나님 사이는 인간들 사이를 갈라놓고 있는 다른 어떤 적대보다 훨씬 더 크고 깊은 건널 수 없는 골짜기로 가로 막혀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 그 골짜기를 건널 수 있는 다리를 놓으셨다,

하나님께서 그 같은 적대와 진노의 깊은 골짜기를 연결시키실 수 있으시다면, 그가 다양한 사람들을 하나의 새로운 공동체로 만드시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2장 17 -18절


●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바울이 사용한 언어를 보면, ‘먼데 있는 자’와 ‘가까운 데 있는 자’라는 표현들을 찾아볼 수 있는 이사야 57장 19절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만, 바울이 사용한 언어는 또한 우리들에게 이사야 52장 7절의 말씀을 상기시켜 주고 있다.

거기서 이사야 선지자는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표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고 외쳤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모두에게 “평안을 전하(셨고)” 그들은 복음의 기쁜 소식을 들었다.

복음을 믿은 사람들은 하나의 새로운 신앙 공동체로 연합되었다.

더 이상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사이의 분열이 그들을 예배에서 분열시키지 않았다.

이제 그들은 둘 다 하나님을 함께 예배할 기회를 가졌다.

이제 복음을 전파하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과 그리고 그들 서로가 화목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화평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의 결과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되었다.

유대교에서는, 모든 사람이 아버지께 동등하게 나아갈 수 없었다.

여호와의 임재는 언약궤가 있던 곳인 ‘지성소’와 연관되어 있었다.

유대인들은 지성소가 있는 건물인 성전의 문턱에까지 올 수 있었다.

그렇지만,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갈라놓은 하나의 담이 중간에 있었다.

이방인들은 이방인의 뜰을 넘어 유대인들의 뜰에 들어갈 수 없었다.

이 학습구절에서는 언급되고 있지는 않지만, 사람들을 갈라놓는 것과 관계된 것으로 ‘여인의 뜰’이 있었다.

유대인 여인들은 유대인 남자들이 예배하는 뜰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러므로, 유대교 예배는 사람들을 갈라놓고 분리시키는 일이 되었다.

그런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제 모든 사람들은 어떤 구별도 없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 나아감을 얻게” 되었다.


새 공동체의 시민이 되다 (에베소서 2장 19 -22절)


바울은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새 언약의 공동체에서 시민이 되었다고 선언하였다.
그리스도를 기초로 삼아, 신자들은 하나님께서 성령님으로 거하시는 처소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고 있다.


2장 19 - 20절


●    그로므로 이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오직 성령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바울은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던 이방인 신자들의 이전의 심각한 모습을 제시하였다 (엡 2: 12).

그러나,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되자, 에베소서 2장 19절보부터 22절에 묘사된 그들의 모습은 반전되었다.

그들은 “외인”과 “나그네”로부터 하나님의 왕국의 “시민”이 되었다.

외인”이라는 첫 번째의 용어는 이스라엘 영토 밖에 살았던 사람들을 가리켰다.

나그네”라는 두 번째의 용어는 이스라엘 땅으로 와서 그곳에 살고 있던 이방인들을 가리켰다.

어느 쪽이 되었던, 그들은 이스라엘 “시민”이 아니었다.

그러나 십자가의 능력을 통해, 이들 외국인들은 이제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 되었다.

이방인들은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의 왕국에서 외국인들이나 이등 시민들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하나님의 왕국과 관련된 모든 권리와 책임을 가진 시민이 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유대관계는 시민권보다 훨씬 더 깊다.

바울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님의 권속”, 즉 “하나님의 가족”으로 불렀다.

하나님의 백성은 한 왕국의 백성이 될 뿐 아니라, 한 가정의 가족이 되고 있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믿음의 가정들”에 대해 말하였다 (6: 10).

에베소서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의 새로운 믿음의 공동체를 “하나님의 권속”, 즉 “하나님의 가족”으로 불렀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베풀어주시는 것을 신뢰하고 받아들이는 신자들은 그의 가족의 일원이 된다.

신자들은 하나님의 가정에 자녀들로 입양된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 같은 일이 일어났을 때, 그들은 그들의 가족의 일원으로서 많은 새로운 형제들과 자매들을 만나게 된다.


믿음의 공동체를 하나님의 왕국과 가족으로 비유한 것은 교회 안에서 성도들을 연합하며 하나로 만드는데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있는가?


바울은 말하기를 믿음의 공동체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는다)”고 하였다.

초대 교회에서 이들 두 직분은, 에베소서 4장 11절에서 볼 수 있듯이, 교회를 섬기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은사들로 서로 연관되고 있다.  

사도란 호칭은 사명을 받고 보냄을 받은 사람을 뜻하는 말로, 그 호칭은 예수님의 열 두 제자는 물론 바울과 바나바 등 특별한 사명을 받아 가지고 선교하며 교회를 개척했던 제자들을 가리켰던 것으로 보인다 (행 14: 14).

선지자들” 혹은 “예언자들”은 교회를 말씀으로 가르치며 세우는 일을 위해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을 가리켰다 (고전 14: 4).

그 같은 은사들을 받은 교회지도자들이 복음을 전하며 가르는 사역을 할 때,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그 모든 것의 “모퉁잇돌”이 되셨다.

“모퉁잇돌”이라는 말은 건축 용어로, 그것은 건축물을 서로 연결시켜 붙들어주는 돌, 혹은 밭쳐주는 기초(基礎)를 묘사하는 말이 되고 있다.

예언자들과 사도들이 그리스도를 전하며 복음을 가르치면, 하나님은 새로운 믿음의 공동체를 지으신다.


예수님을 전파하며 복음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메시지의 중심에 두는 것이 왜 중요한가?


2장 21 - 22절


●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사도 바울은 그 모퉁잇돌 안에서 “건물 전체가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간다고 하였다 (표준 새번역 개정판).

건물 전체”라는 말로, 바울은 마지막 때에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모든 세대를 통하여 모든 믿는 자들을 마음에 그리고 있었다.

그 말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가리지 않고,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모두를 포함하고 있다.

사도 베드로는 여기서 사도 바울이 “모퉁잇돌”로 표현한 것을 “사람에게는 버린바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로 묘사하고, 그를 믿고 구원을 받은 신자들을 “산 돌들”로 부르면서 구속 받은 신자들에게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와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라고 하였다 (벧전 2: 4 -5).

본문의 “서로 연결하여”와 “성전이 되어 가고”라는 말은 하늘의 건축자이신 하나님이 “성전”을 지으시면서 필요한 곳에 산돌 들을 하나씩 놓으시는 모습을 상상하게 한다.

동사의 시제는 지속적인 일을 나타내고 있다.

하나님의 구속 받은 사람들을 “성전”으로 묘사한 것은 교육적이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이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에게 기도할 수 있도록 그의 임재를 상징하는 그의 이름을 성전에 두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왕상 8: 29).

이제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성령님을 통하여, 돌들로 지은 건물이 아니라, 그의 구속 받은 백성들 가운데 거하시겠다고 약속하신다.

한 때 돌 판 위에 기록되었던 율법은 이제 믿는 자들의 마음 판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게 기록될 것이다 (렘 31: 33; 히 8: 10).

한때 도살당한 짐승의 피로 이루어졌던 성전 희생제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을 십자가 위에서 속죄 제물로 드리심으로 충족조건을 이루셨고 (히 10: 10), 감사하는 신자들은 또한 거룩한 삶으로(롬 12: 1) 그리고 그의 이름을 찬송하는 입술의 열매로 제물을 삼았다 (히 13: 15).

이 단원에서 바울이 결론적으로 한 말은 하나님이 성도들 가운데서 새로운 영적 성전을 세우시는 이유를 가리키고 있다.

그의 계획은 믿는 자 각자가 그리고 세계의 모든 교회들이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전서 3장 16절에서 믿는 자들과 교회를 가리켜 말하기를,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 하였다.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임재는 믿는 자들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능력을 통해 체험 할 수 있다.



말씀을 나의 상황에 적용하기:


●    구원은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이고 모든 신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기 때문에, 우리는 편견의 벽을 허물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만 우리는 진정한 화평을 누릴 수 있다.
●    모든 신자들은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이자, 그의 나라의 시민이다.


믿는 자들이 지역 사회에서 화목과 연합을 이루도록 당신의 성경 공부반은 어떤 일을 할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