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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죽음을 위한 준비 - 제 12과 - 2019년 5월 19일 주일 장년성경연구 - 마가복음 14장 3 -11, 32 -36절

글쓴이 : 강호길 날짜 : 2019-05-16 (목) 11:10 조회 : 78

장년성경연구 교사 교안

2019년 5월 19일 주일 용  


제 12과



예수님의 죽음을 위한 준비 



학습구절: 마가복음 14장 3 -11, 32 -36절   


성경진리:

예수님은 아버지의 계획에 순종하여, 기꺼이 우리의 죄 값을 치르셨다.


주요교리성자 하나님

예수님은 직접 순종하심으로 하나님의 법을 지키셨고, 십자가 위에서의 대속의 죽음으로 사람들이 죄로부터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을 수 있는 준비를 해 주셨다 (골 1: 14).


암송구절:  마가복음 14장 36절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Abba, Father,” he said, “everything is possible for you. Take this cup from me. Yet not what I will, but you will.”        



시작하는 글:


기대감에 가득 찬 특별 행사나 프로그램들이 단연 우리 달력의 주축을 이룬다.

행사나 프로그램 하나 하나가 열릴 때가 다가오면, 기대감으로 마음이 흥분하기 시작한다.

그 행사나 프로그램이 우리의 기대를 넘어설 경우, 우리는 앞으로 다른 사람들도 그 행사에 참여하도록 알리며 격려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 행사의 홍보대사가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의 기대에 못 미치면, 이야기는 전혀 달라진다.


우리의 기대치들은 한 사건이나 행사에 대한 우리의 견해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

그 행사 자체의 질적인 면과 그 행사에 대한 우리의 기대치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가?  설명해 보라.



본문배경설명   


마가복음 14장 1절부터 52절까지


예수님은 몇 일 안으로 죽음의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예수님은 언제 어떤 일들이 자기에게 일어날지를 알고 계셨다.

마가는 그 같은 예수님의 마지막 때에 사람들이 그에게 어떤 반응을 나타내고 있는지를 조명(照明)하였는데, 특별히 값비싼 향유로 예수님께 나타낸 한 여인의 헌신과 자기가 따르며 섬기던 주님을 유대 종교지도자들에게 넘겨주기로 합의한 가룟 유다의 배반을 나란히 기록하여 대조시켰다.

이번 주의 학과는 그같이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는 예수님께 대한 서로 다른 반응에 주의를 집중하고 있다.

우리는 또한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신 고통에 찬 기도를 살펴봄으로, 그가 곧 겪게 될 고난에 대한 그 자신의 반응을 생각해 볼 것이다.

마가복음 13 장은 예수님이 감람 산에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말씀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이 금요일 날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이전인 화요일 오후에 전하신 것으로 믿어지고 있다.

다음 날인, 즉 오늘의 계산법에 의하면, 수요일에 예수님은 베다니에서 값 비싼 향유로 부음을 받으셨다.

그러나 많은 성경 학자들은 이것이 요한복음 12 장 1 ~ 8 절에 기록된 사건과 동일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요한복음은 마리아의 이름을 직접 언급하고 그 사건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승리의 입성을 하시기 전날에 일어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요 12: 3, 12 -19참조). 

반면에, 마가복음은 그 같은 기름 부음이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일어났다고 진술하고 있다.

그러므로, 어느 때라고 확실하게 독단하기는 불가능하다.

확실한 것은 마가가 예수님에 대한 여인의 헌신과 유다의 배신을 의도적으로 대조(對照)시켰다는 것이다.

다음 날인 목요일에, 예수님은 두 제자를 성내로 보내어 유월절 음식을 준비하게 하셨다.

유월절은, 유대인들이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하다가 자유를 얻은 것을 기념하여 매년 크게 지키는 절기로, 유대인들에게 그것은 한 해의 가장 중요한 종교 행사였다.

예수님은 그날 저녁 이미 식탁 위에 준비되어 있는 두 가지의 음식물, 즉 빵과 잔을 취하셨다.

그런 다음, 예수님은 그것들을 하나의 새로운 기억물, 즉 죄와 죽음의 노예에서 자유를 얻게 해 준 그의 죽음을 기념하는 상징물로 바꾸셨다.

그날 저녁 유월절 식사 중에 혹은 그 후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그가 자기를 모른다고 부인할 것이라는 말씀으로 경고하셨는데, 베드로는 그 말을 놀라워하며 강하게 부인하였다. 

그 후에, 예수님은 열 한 제자들과 함께 (유다는 이미 그들을 떠나고) 감람 산에 있는 “겟세마네라 하는 곳”으로 가셨다.

거기에서, 예수님은 기도로 괴로움에 찬 자신의 마음을 하늘 아버지께 쏟아내고 배반자가 도착하기를 기다리셨다.

    


학습구절 연구


오해 받은 예수님의 죽음을 위한 준비 [마가복음 14장 3 -5절]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있는 시몬의 집에서 식사를 하실 때에, 한 여인이 값진 향유가 든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머리에다 부었다. 일부 제자들은 그같이 하는 것을 오해하고 화를 내면서, 그 향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 줄 수 있겠다고 주장하였다.


14장 3절


●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함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승리에 찬 입성을 하신 후 겟세마네 동산에서 잡히실 때까지의 주간 동안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낮에는 예루살렘에서 보내고 밤에는 베다니라는 동네로 나가서 보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동쪽으로 2 마일 정도 떨어져 있던 마을로, 나사로와 그의 누이들인 마르다와 마리아가 살던 곳이기도 하였다 (요 11: 1 참조).

부활하신 후, 예수님은 그 동네 근처에서 승천하셨다 (눅 24: 50).

나사로와 두 자매는 예수님의 마지막 주 동안에 그를 자기들의 집에 모셨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적어도 한번은, 제자들과 함께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를 하셨다.

복음서에서 “나병환자 시몬”에 대한 다른 기사는 찾아볼 수 없다.

많은 성경학자들은 그가 나병환자였는데, 예수님이 그를 고쳐주신 것으로 믿고 있다.

그가 여전히 나병환자였다면, 그는 의식적으로 부정했기 때문에 다른 유대인들은 식사를 하러 그의 집에 오지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그는 예수님과 다른 여러 사람들을 저녁 식사에 초대할 만큼 부유하였다.

예수님이 그같이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다.

순전한 나드”는 인도에서 발견 된 뿌리에서 추출한 향기로운 기름이었다.

 그러므로 그것은 매우 값지고 비싼 것이었다.

그 여인이 그같이 값진 물건을 어떻게 소유하게 되었는지는 알 방법이 없다.

그 여인은 예수님이 자기에게 해 주신 어떤 일에 대해 감사를 표하고 있었는가?

아니면 그 여인은 단순히 메시야이신 예수님에게 헌신의 마음을 표하고 있었는가?

놀라운 것은 “그리스도” 혹은 “메시야”라는 말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는 뜻인데, 그것은 예수님이 문자 그대로 기름부음을 받은 유일한 경우가 되고 있는 것이다.

14장 4 -5절


●   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어 서로 말하되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
●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화를 (낸)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6절부터 9절까지에서 말씀하신 것이 제자들이었던 것을 감안할 때, 예수님의 제자들이었다 (마 26: 8 참조).

그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야고보와 요한이 십자가를 지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예수님에게 그의 왕국에서 가장 높은 자리를 요구했던 것처럼 (마가 복음 10: 35 ~ 41), 예수님과 그의 우선 순위를 이해하지 못한 또 다른 사례가 되고 있다.

다른 한편, 이것이 요한복음에 기록된 것과 같은 사건이라면, 화를 내며 큰 소리로 불평을 늘어 놓은 사람은 다름 아닌 가룟 유다였다 (요 12: 4).

제자들이 중요한 문제로 삼은 것은 여인의 행동이 아니라, 비록 당시의 문화권에서 남자들만 식사하는 자리에 여자가 갑자기 끼어든 것은 받아들이기 힘들고 큰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이 의심의 여지가 없었지만, 그것보다는 돈을 낭비하는 것같이 보인 것이었다.

그들은 아직 예수님은 그 여인이 드리는 최상의 것을 받을 자격이 있으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 여인이 주님께 사랑과 헌신을 표현하는 것은 돈의 가치로 계산될 수 없는 것이었다.

제자들 중에 하나가 그 여인이 예수님을 위해서 쏟아 부은 향유의 금전적 가치를 계산하였는데, 요한복음 12장 4 -5절에 의하면 그는 가룟 유다가 되고 있다.

그 향유는 “삼백 데나리온” 이상의 값이 나갔는데, 그것은 하루 품꾼이 일년에 벌 수 있는 돈이었다.

마가복음 12장 41 -44절에서, 예수님은 한 가난한 과부를 칭찬하셨는데, 이는 그녀가 기꺼이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하나님의 일에 드렸기 때문이었다.

가난한 과부에게 그것은 아주 큰 액수였다.


예수님의 죽음을 위한 준비에 대한 칭찬 (가복음 14장 6 -9절]


14장 6 -7절 


●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제자들이 화를 내며 다른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비난한 일은 그 여인의 가슴을 찔렀음에 틀림없다.

그것은 예수님의 마음도 아프게 하였다.  

예수님은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는 말로 그 여인을 옹호하셨다.

그런 다음, 예수님은 여인이 행한 일을 바르게 해석해 주셨다.

낭비적이거나 경솔한 것과는 거리가 멀게,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고 하셨다.

좋은”이라는 단어는 “아름다운”이라고 번역될 수 있다.

그 용어는 아름답거나 도덕적으로 선한 것을 의미 할 수 있다.

그 여인이 행한 일은 그 두 가지가 다 되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은 항상 함께 있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무관심의 뜻이 아니었다.

예수님은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며”라고 한 신명기 15장 11절을 언급하고 계셨다.

그리고 그 구절에서 모세는 계속해서 “너는 반드시   안에 있는  형제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손을 펼지니라고 하였다.

예수님도 이미 가난한 자들에게 큰 관심을 나타내셨다 (막 10: 21).

예수님은 제자들이 항상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많은 기회를 갖고 있음을 아셨다.

사도 행전은 일 세대 신자들이 어떻게 그 같은 일을 행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제자들은 그 여인이 한 것처럼 예수님께 직접적으로 헌신감을 나타낼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을 것이다.

그 여인은 예수님께 진정한 헌신의 마음을 표현할 적절한 순간을 포착하였던 것이다.


14장 8 -9절 


●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그 여인을 칭찬하실 때 두 가지 점을 추가로 지적하셨다.

첫째로, “그는 힘을 다하여”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그녀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하였다”는 뜻이 되고 있다.

그 말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드렸다”는 뜻이 될 수도 있다.

둘째로, 예수님은 그 여인이 자기에게 향유를 부어 행한 일을 곧 임할 그의 “장례를 미리 준비(한 것)”으로 해석하셨다.  

실제로, 우리는 그 강한 향기가 그 순간부터 예수님이 무덤에 인봉되실 때까지 어디를 가셨든 그에게 남아 있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여인이 예수님께서 곧 십자가의 처형을 받게 될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고 가정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것이 그의 몸에 처음으로 향료를 바른 유대인의 장례관습이 되고 있는 것과 후에 니고데모가 그의 시체에 향품들을 쌌을 때 완료될 것을 알고 계셨다 (요 19: 39 -40).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는 말씀으로, 그 여인이 행한 일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기억될 놀라운 방법에 대해 예언하셨다.


●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말은 그가 하시려는 말씀의 중요성과 심각성을 강조하는 예수님의 방법이 되고 있다.
●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이란 말은 제자들의 미래 선교에 대한 사명을 밝혀준다. 그들의 일차적인 과업은 복음을 전파하는 일이 될 것이다.
●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라는 말은 복음의 메시지가 온 세계에 전파되는 것에 대한 예수님의 기대를 가리킨다. 오늘날 우리는 그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의 산 증인들이다.
●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라는 말은 이 이야기가 처음에는 초대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말로 전해진 것을 가리키고 있다. 그러나, 마가가 이 이야기를 그의 복음서에 기록했을 때, 그것은 영속적인 하나님의 말씀의 일부로서 소중하게 간직되었다.
●   그를 기억하리라”는 말은 후에 예수님이 주의 만찬을 행할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고 하신 것과 같다 (눅 22: 19; 고전 11: 25). 물론,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가 그 여인의 헌신의 행위를 기억하도록 도와 줄 하나의 의식을 세우지 않으신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주님의 만찬을 축하 할 때마다 세상을 위한 예수님의 희생적인 사랑을 분명하게 기억하는 것처럼, 성경에서 그 여인이 행한 일을 읽고 공부할 때마다 예수님을 위한 그 여인의 사랑을 기억한다. 


예수님은 그를 믿고 따르는 신자들이 예기치 않은 방법이나 아낌 없는 마음으로 그에게 헌신감을 보여줄 때 지금도 여전히 기뻐하신다고 믿는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


 유다에게 배신을 당하신 예수님 [마가복음 14장 10 -11절]


14장 10절


●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가 예수를 넘겨 주려고 대제사장들에게 가매


마가복음 14장 1 ~ 2 절은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잡아서 죽이려는 강한 열망과 함께 방도를 강구하고 있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처음에 그들은 “민란이 날까” 두려워서, 유월절 음식을 먹는 것으로 시작되는 일주일 간의 무교절 축제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기로 결정했었다. 

그러나,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가” 종교지도자들을 찾아와 예수님을 넘겨 주겠다고 했을 때 상황은 바뀌게 되었다.

마가와 다른 복음서 기자들은 유다가 그같이 한 동기를 결코 설명하지 않았다.

돈에 대한 욕심 때문이었는가?

예수님에게 실망했기 때문이었는가?

예수님으로 하여금 정치적인 행동을 취하게 하려는 하나의 방법이었는가?

이유가 어떤 것이었든 간에,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하기 위해 대제사들을 찾아갔던 것이다.


14장 11절


●   그들이 듣고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약속하니 유다가 예수를 어떻게 넘겨 줄까 하고 그 기회를 찾더라   


내부의 누군가가 배신을 하고 나선 것은 예수님을 제거하기 위해 갖가지 기회와 방법을 찾고 있던 유대인 종교지도자들에게 믿기 어려운 좋은 일이 되었다. 

그들은 “듣고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약속하(였다.)”

마태복음 26장 15절에 의하면, 유다는 그들에게 돈을 요구하였고, 그들은 “은 삼십”을 달아 주었다.

유다가 그 같이 악한 일을 내부자의 범행으로 끝낼 수 있는 방법이 가능해 졌으므로, 그들 종교지도자들은, 처음에는 망설였던 것에도 불구하고, 유다가 명절기간 동안에 일을 끝내기를 원하였고 그같이 하는 것이 더 좋겠다고 생각하였다.

유다는 “예수를 어떻게 넘겨줄까 하고 그 기회를 찾(기 시작하였다.)”

유다가 그 같은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찾는 데에는 수요일부터 목요일 저녁까지 하루가 채 걸리지 않았다.

잘 알려진 대로, 유다는 예수님이 군중들을 떠나 계신 시간과 장소를 택하였는데, 그것은 한 밤중과 동떨어진 장소인 겟세마네 동산이 되고 있다.

유다가 입맞춤으로 예수님을 배반한 때로부터 (목요일 밤 자정 이후) 예수님이 죽어서 무덤에 묻힐 때까지의 (금요일 일몰직전) 기간은 스물 네 시간이 채 안 되는 것이었다.

유대인 종교지도자들의 관점에서 보면, 일들은 훌륭하게 끝났다.

그들 종교지도자들과 유다는 그들의 악한 일에 대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과 예수님께 기름을 부은 여인 사이의 대조(對照)는 더 이상 두드러질 수는 없다.

그 여인이 예수님에게 마음과 뜻을 다 한 사랑의 헌신을 나타낸 좋은 본보기가 되고 있는 것처럼, 유다는 주님을 배반한 부정적인 본보기가 되고 있다.

두 사람이 행한 일은 역사적인 사건이고 정확하게 다시 할 수 없는 성격의 것이지만, 오늘날 신자들은 예수님에 대한 충성을 표현하거나 그를 배신하는 방식으로 행동 할 수 있는 선택을 가지고 있다. 


오늘 날 어떤 사람이 어떻게 그리스도를 배반 할 수 있는가?

다음의 진술을 가지고 서로 이야기해 보라:  "그리스도를 배반하는 자들은 궁극적으로 실패하고 심판을 받을 것이다."


아버지의 뜻에 전적으로 헌신하신 예수님 [마가복음 14장 32 -36절]


14장 32절


●   그들이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유월절 절기는 해질 무렵에 시작되었다.

그것은 오늘의 시간 계산 법을 따르면 목요일 저녁이 되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있는 한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드셨다 (14: 15 -16).

그곳에 있을 때, 예수님은 그 방에 자기를 배신할 자, 곧 자기를 팔자가 있는 것에 대해 말씀하셨다 (14: 18 -21).

예수님은 또한 주의 만찬을 제정하셨다 (14: 22 -25; 요 13: 21 -30).

요한복음 14장부터 17장까지에 의하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여러 가지를 가르치시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셨는데, 다른 무엇보다 특별히 성령님이 그들에게 임하실 것과 그가 행하실 일에 대해 광범위하게 가르치셨다.

그런 다음, 예수님과 제자들은 시내를 떠나 기드론 시내를 건너 감람산으로 걸어 나갔다.

마침내, 그들은 ‘감람유 틀’이라는 뜻인 “겟세마네라는 곳”에 이르렀다.

요한복음 18: 1은 그곳을 “동산”으로 불렀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기가 좀더 나아가 기도하고 있는 동안에 “여기 앉아 있으라”고 하셨다.

그러나, 실제로 뒤에 남아 있게 된 제자들은 단지 여덟 명 뿐이었다. 


14장 33 -34절


●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새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예수님은 전에 죽은 어린 소녀를 살리는 놀라운 일을 하셨을 때 (막 5: 37 -42) 그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형되시어 율법을 대표하는 모세와 예언을 대표하는 엘리야를 만나시는 놀라운 체험을 하셨을 때 (막 9: 2) 베드로와 야고보 그리고 요한을 데리고 가셨던 것처럼, 이제 그는 십자가를 바라보시며 엄청난 내적 고통의 짐을 지고 기도하려고 하셨을 때도, 그들 세 제자들을 따로 데리고 가셨다.

 예수님은 자신의 내적 고뇌와 갈등 그리고 고통을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라는 말로 표현하셨다.

죽게 되었으니”라는 말은 예수님의 슬픔이 너무나 크고 극심하여 거의 치명적인 상태에 이르렀다는 뜻으로 이해될 수 있다.

좀더 가능성 있게 보이는 다른 견해는 예수님의 내적 투쟁과 큰 슬픔은 임박한 십자가의 죽음에 초점이 맞추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죽음은 세상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 되는 것이다.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뿐만 아니라,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인간의 죄의 모든 무게는 십자가의 처형에 의한 죽음의 공포와 고통에 더해 질 것이었다.

예수님은 세 제자에게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고 하셨다.

예수님의 그 말씀에는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영적으로 깨어있으라는 뜻이 담겨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은 제자들이 그의 고통에 동참하기를 원하셨다.  


14장 35 -36절


●   조금 나아가사 땅에 엎드리어 될 수 있는 대로 이 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여
●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예수님은 세 제자를 남겨두시고 “조금 (더) 나아가(셨다.)”

유대인의 일반적인 기도자세와는 달리 - 즉 “서서” 그리고 어쩌면 양 손을 위로 들고 하는 자세(11: 25) – 예수님은 기도를 하기 위하여 “땅에 엎드리(셨다).” 

그것은 그의 상황의 긴박함을 보여준다.

예수님이 “될 수 있는 대로 이 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간구하는 기도를 하셨다.

여기서 예수님이 언급하신 “”는 자기를 위한 하나님의 목적이 성취되는 때로, 거기에는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수치스럽고 고통에 찬 죽음이 포함되고 있는 것을 예수님은 아셨다.

예수님의 이 기도에서 우리는 두 가지 점을 추가로 지적할 수 있다.

하나는, 이 기도가 예수님의 참된 인성을 강하게 나타내고 있다는 점이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직면하고 있는 상황과 사태를 두려워하셨다.

다른 하나는,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라는 말은 하나의 역설이 되고 있는 것이다. 

정의를 하자면, 전능하신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막 10: 27),

다른 한편, 구원의 길이 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을 죽으셔야 하는 것이다.

만일 예수님이 그 때를 피하신다면, 그는 결코 메시야가 되실 수 없었다.

예수님이 “아빠”라는 용어를 사용하신 것은 예수님과 하나님의 친밀한 관계를 나타내고 있다.

그리스도 이전에 유대인들이 이 용어를 사용하여 하나님을 불렀다는 기록이 없다.

35절에서, 예수님은 그가 겪을 시련과 고통을 “”로 지칭하셨다.

36절에서, 그는 그것을 “”으로 부르셨다.

야고보와 요한이 하나님의 왕국에서 가장 좋은 자리를 원했을 때, 예수님을 그들에게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실 수 (있느냐)”고 물으셨다 (10: 38).

예수님은 그 잔이 자기에게서 옮겨지기를 기도했던 것이다.

결국, 예수님은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는 말로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헌신을 확언하셨다. 


말씀을 나의 상황에 적용하기:


●   신자들은 사역에 대한 견해나 생각들이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이 자기를 구세주로 믿고 헌신 할 때 기뻐하신다.    
●   그리스도를 배반하는 자들은 궁극적으로 실패하고 심판을 받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