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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를 사해 주시다 - 제 2과 - 2019년 3월 10일 주일 - 장년성경연구 교사용 교재 - 마가복음 2장 1-12절

글쓴이 : 강호길 날짜 : 2019-03-07 (목) 02:03 조회 : 110

장년성경연구 교사 교안

2019년 3월 10주일 용  


제 2과



죄를 사해 주시다



학습구절: 마가복음 2장 1 -12절


성경진리:

예수님은 죄를 사해 줄 수 있는 권세를 갖고 계신다.  


주요교리: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시다 (눅 22: 70).         


암송구절:  마가복음 2장 5절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When Jesus saw their faith, he said to the paralyzed man,

“Son, your sins are forgiven.”      



시작하는 글:


복잡한 사회의 논쟁점들을 소셜 미디어를 통해 간단하게 요약해서 표현하는 것을 선호하는 세상에서 혼돈(混沌)과 오해(誤解)는 생기게 마련이다.

사회의 저명 인사들은 논쟁적인 자기의 주장을 펴거나 논란이 될 수 있는 주제들을 제시하여 뜨거운 뉴스거리로 만든다.

그런 다음, 그 문제를 깊이 생각한 후에, 그들은 한 발자국 물러선다.

그들은 자신의 말과 거리를 둔다.

예수님은 지상 사역 기간 동안에 논쟁을 불러 일으킨 말씀을 많이 하셨다.

그러나, 그는 죄를 사해 줄 수 있다고 하는 상상할 수 없는 주장을 포함하여, 자신이 하신 말씀에서 결코 물러나지 않으셨다.


당신은 이번 주간에 누군가가 터무니 없는 주장을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는가?

그 사람은 그 같은 주장을 뒷받침 할 권한을 가지고 있었는가?  이유는 무엇인가?



본문배경설명 


마가복음 1장 21 절부터 3장 6절까지


이 과는 죄를 사해주시는 예수님의 권세에 대한 것이다.

모든 죄는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지은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에만, 우리는 이번 주의 핵심 구절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다)”(마 6: 12) 할지라도, 죄를 사해 주는 최종적인 권세는 하나님만이 갖고 계신다.

예수님이 죄를 사해 주신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이 되고 있다.  

그러므로 그분에 관해 필연적인 결론이 있다.

그렇지만, 그 말을 하기 전에, 우리는 마가가 갈릴리 지역에서의 예수님의 공사역에 대한 이야기를 어떻게 전개하고 있는지를 추적하게 될 것이다.

마가복음 1장 1절부터 3장 6절까지는 예수님의 권세에 초점이 맞추어지고 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그를 따라오라고 부르심으로 그의 권세를 나타내셨다 (1: 16-20).

마가는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사역하실 때 하루 동안에 바쁘게 행하신 전형적인 일들을 예로 들어 자세히 전해줌으로 예수님의 권세를 밝혀주었다. (1: 21 ~ 34).

그런 다음, 예수님은 갈릴리 전역에 걸쳐 광범위한 전도 여행을 시작하셨다.

길을 가시다가, 예수님은 한 나병환자를 고치셨다 (1: 35 -45).

그 결과는 예수님에게 엄청난 인기가 따르게 된 것이다.

사방에서 사람들이 그에게로 몰려 나아왔다.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쳐주시고 죄를 사해 주신 마가의 이야기는 그 같은 상황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2: 1-12).

이 사건 이후, 마가는 예수님의 권세를 보여주는 다른 일들을 전하였다.

그는 세리인 레위에게 “나를 따르라”고 부르셨다 (2: 13 -17).

그는 “신랑”으로서의 자신의 특권을 주장하시면서, 그의 제자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고 하였다 (2: 18-22).

그는 “안식일의 주인”으로서의 자신의 권세를 선언하셨다 (2: 23 -28).

그는 또한 안식일 날 “손 마른 사람”을 고쳐주심으로 안식일의 주인이 되심을 나타내셨다 (3: 1 -6).

금주의 학습에서, 우리는 몇 가지 관계 점들을 살펴보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죄와 질병의 관계는 무엇인가?

죄를 사해 줄 수 있는 예수님의 권세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그의 정체성의 관계는 무엇인가?

이 이야기를 읽을 때 우리에게 어떤 반응이 예상되고 있는가?


학습구절 연구                                


표현된 믿음 [마가복음 2장 1 -5절]


2장 1 -2절


  • ●   수 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들린 지라
  • ●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가버나움”은 갈릴리 바다 북쪽 해안에 위치한 주요 어업 도시로, 시몬과 안드레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 형제들이 고기잡이 배를 부두에 정박해 두었던 곳이었다.  

예수님은 여행하지 않을 때의 자신의 거처와 사역 본거지로, 그의 고향인 나사렛 대신에 사람들이 많이 살며 교통의 중심지인 가버나움을 택하였다.

예수님이 “집에 계시다”고 했을 때, 마가는 그 곳이 누구의 집이 되고 있는지를 확실히 밝히지 않았다.

가장 가능한 추측은 시몬과 안드레의 집으로 보는 것이다 (막 1: 29 참조).

열병으로 누워있던 시몬 베드로의 장모를 고친 후에 일어났던 상황과 같이 (1: 30 -33), 예수님이 계신 집에는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되었(다).”   

아무도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가득찼던 것이다.

군중들이 그같이 많이 그 집에 많이 몰려 온 것은 그 전의 경우처럼(1: 34) 기적적인 치유를 받거나 기적을 보려는데 있었을지 몰라도, 그때 예수님은 이적을 행하시기 보다는 “그들에게 도를” 말씀하셨다.

도를 말씀하다”라는 말은 예수님이 구약의 성경말씀을 가르치시고 하나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파하신 것을 나타내고 있다.


2장 3 -4절


  • ●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 ●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리니


발을 내디딜 틈도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꽉 찬 그 집에 네 사람이 침상에 누운 한 중풍병자를 메워가지고 예수님께 고침을 받으려고 찾아 왔다 (마 9: 2 참조).

성경학자들은 그들 네 사람을 병자의 친구들로 보고 있디.

여기서 ‘중풍병’이라는 말은 몸의 일부 혹은 전체가 마비된 상태의 병을 가리키는 것으로, 네 친구들이 그 환자를 침상에 누운 채 메워가지고 온 것을 보면 그의 상태가 얼마나 심각했던 지를 알 수 있다.

친구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과 치유를 받아 낫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컸던 친구들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때, 그를 예수님께로 데리고 오기로 결심하였다.  

본문은 그 병자가 어떻게 그 같은 상태가 되었는지 그리고 얼마나 오랫동안 고통을 겪고 있는지를 밝히지 않고 있다.

예수님이 그를 고쳐 주실 때, 그의 죄를 사해주시는 문제를 먼저 언급하신 사실은 아마도 그의 죄와 그가 겪고 있는 고통 사이에 직접적인 관계가 있음을 암시 할 수도 있다.

1 세기 당시에 유대인들은 일반적으로 그리고 쉽게 질병과 죄 사이에 직접적인 관계가 있음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요 9: 2 참조).

어떤 경우가 되었건, 이 시점에서 마가가 강조하고 있는 점은 중풍 병자를 예수님께로 데려 온 친구들의 강한 믿음과 결의 그리고 죄를 사해 줄 수 있는 예수님의 권세가 되고 있다.

사람들이 집 안과 마당까지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네 친구들은 그 병자를 “예수님께 데려갈 수 없(었다).

침상을 메고 온 사람들은 병자를 예수님께로 데려가려는 사명을 포기하지 않았다.

예수님 당시에 전형적인 가정 집은 사각형 모양으로 된 구조의 일층 집으로, 방이 세 개 혹은 네 개 정도가 있었고, 안 마당이 있었으며 지붕은 평평하게 되어 있었다.

집이 튼튼하게 지어 졌으면, 평평한 지붕은 집의 이층으로 상용되어, 야외 잠자리나 식당 혹은 기도처소가 되기도 하였다 (행 10: 9).  

그리고 집의 한 쪽에는 지붕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나 있었다.

마가가 집의 구조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은 것은, 그의 독자들이 그 같은 사실들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는 단순히 네 사람이 예수님이 도를 가르치고 “계신 곳(방)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리니”라고 하였다,  

그들은 지붕전체를 뜯어낸 것이 아니라, 중풍병자가 누워있는 침상을 들어 내릴 만큼의 부분을 뜯어냈던 것이다.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라는 말에서는 지붕이 목재 틀에다 진흙과 짚으로 채운 다음 타일로 덮어서 만들어 졌던 것으로 보인다 (눅 5: 19) 참조).

오늘 날 마가 복음을 읽는 독자들은 왜 저자가 본문에 의해 제기 될 수 있는 어떤 질문들을 간과(看過)했는지 의아하게 생각할 수 있다.

예수님과 그의 청취자들은 머리 위에서 기와장이 벗겨지는 소리를 들었을 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

진흙과 짚으로 만들어진 작은 조각들과 부스러기 들이 천장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을 때, 그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그리고, 어떻게 네 사람은 중풍병자를 돕는 과정에서 다른 사람의 집을 그같이 손상시켜도 괜찮다고 생각했는가?

마가는 그 어떤 것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단순히 일어난 일련의 일들만 알려주었다.

네 사람은 중풍 병자를 데리고 예수님을 만나러 왔다.

그들은 예수님이 계신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그들은 중풍병자가 누워있는 침상을 들고 지붕으로 올라가 예수님이 계신 방의 지붕을 뜯어냈다.

그리고 그들은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렸(다).”      


2장 5절


  • ●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우리는 당시의 장면을 상상해 볼 수 있다.

네 남자의 얼굴이 임시로 낸 큰 구멍을 통해 아래로 내려다 보면서, 자기들이 들어 내린 친구를 예수님이 고쳐주실는지 응시하고 있다.

충격과 놀라움에 휩싸인 청중들은 먼저 못마땅한 표정으로 네 사람의 얼굴들을 쳐다보고, 시선을 침상 위에 누워있는 사람에게 돌린 다음, 마침내 그 같은 방해(妨害)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을 살피기 위해 그를 쳐다보았다.

중풍병자는 침상에 누워 천천히 내려오면서, 많은 얼굴들 중에 한 얼굴, 즉 예수님의 얼굴을 찾으려고 할 때, 시선의 물결에 휩싸이는 것을 느꼈다.

그러다가, 침상에 누워있는 자기와 지붕의 큰 구멍을 둘러싸고 있는 네 얼굴을 주목하시는 예수님을 보았다.

예수님은 이 사람들이 취한 행동이 놀라운 믿음의 표시임을 즉시 깨달았다.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라는 말은 공관 복음서 3 곳 모두에 나타나고 있다 (마 9: 2; 눅 5: 20).

그들”이라는 인칭대명사는 중풍병자와 그의 친구들을 가리키고 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없이는 그같이 놀라운 일을 할 수 없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의 병을 고쳐주는 대신에,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셨다.

예수님이 그같이 하신 것을 보면, 이 중풍병자는 육체적인 문제보다 영적인 문제를 해결 받는 것이 더 시급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예수님은 이 기회를 몸의 병을 고칠 수 있는 능력뿐 아니라, 질병의 근본적인 문제인 죄를 사해주는 권세가 있음을 나타내시기를 원하였다.  


의심받은 권세 (마가복음 2장 6 -7절)  


2장 6 -7절: 


  • ●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생각하기를
  • ●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예수님이 성경말씀을 가르치는 그 자리에는 “서기관들”이 앉아있었다.

그들은 마음에 생각하기를,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모독이로다”고 하였다.

서기관으로 번역된 단어의 어원적인 뜻은 ‘글을 쓰다’이다.

1 세기 당시의 유대 서기관들은 종교적인 원문을 복사하는 것 이상의 일을 하였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을 포함하여, 히브리어 성경의 해석자와 교사로 봉사하였고, 율법교사로 사람들의 인정을 받았다.

예수님이 가르치는 자리에 있었던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어떤 이단적인 요소가 있는지를 면밀히 조사하여 비난할 구실을 찾을 목적을 가지고 일부러 왔을 수 있다.  

그들은 예수님을 비난 할 근거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6절의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생각하기를”이라는 말은 저희들끼리 속삭인 것을 가리킬 수도 있다.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초자연적인 능력을 가지신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과 생각까지도 꿰 뚫어 보실 수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이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신 말씀을 듣고 서로 말하기를,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고 하였다.

율법 교사들은 예수님을 “신성모독”으로 정죄하였던 것이다.  

신성 모독”은 하나님께 대한 불경스럽고도 모욕적인 말이 되고 있다.  

 당시 신성모독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었는지를 생생하게 실감하려면, 모세의 율법은 신성모독에 대한 형벌을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지를 찾아볼 필요가 있다.

레위기 24장 16절은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면 그를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돌로 그를 칠 것이니라 거류민이든지 본토인이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면 그를 죽일지니라”고 규정하고 있다.

예수님이 재판을 받으실 때,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사형에 처할 합법적인 죄목으로 제시한 것도 바로 “신성모독”의 문제가 되고 있다 (막 14: 64).

역설적(逆說的)인 것은 그들 종교지도자들이 죄를 새해 주시는 분에 대한 성경말씀은 바르게 해석하면서도, 바로 그 진리의 말씀이 예수님에 대해 계시해 주고 있는 것은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거나 깨닫지 못하는 것이 되고 있다.

문제는 그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과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선포된 권세 (마가복음 2장 8 -11절)  


2장 8 -10절: 


  • ●   그들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생각하느냐 
  • ●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
  • ●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예수님은 서기관들이 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과 중풍병자에게 한 한 말로 인하여 자기를 신성모독으로 정죄하고 있는 것을 아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생각하느냐”는 말씀으로 그들을 질책하셨다.

그런 다음, 예수님은 서기관들이 대답을 거부한 한가지 질문을 제기하셨다.

그 질문은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고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는 것이었다.

그 것은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예수님을 말을 정죄하고 나선 서기관들에게 대담하기 어려운 질문이 되었다.

어느 것이 쉽겠느냐”는 질문 자체만으로 만 따진다면, “네 죄 사람을 받았느니라”는 말이 휠씬 더 쉽게 할 수 있는 말이었다.

누구나 중풍병자에게 그의 죄가 사함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사람들이 그의 죄가 용서 받았는지 아닌지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더 확실한 테스트는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는 말이다.

이는 모든 사람이 그 말의 결과를 분명하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그 사람을 고쳐주실 의도를 갖고 계셨다.

그런데, 예수님은 죄를 사할 수 있는 자신의 권세를 여러 사람들에게 부인할 수 없는 방법으로 드러내시기 위하여 상황을 이런 방식으로 구성하셨던 것이다.

여기서 권세로 번역된 용어는 "권력의 정당한 사용"을 의미하며, 통치자가 원하는 대로 할 권리와 순종을 기대할 수 있는 권리 또는 위법자를 체포할 수 있는 경찰관의 권리 등이 되고 있다.

성경은 모든 권세는 만물의 통치자이신 하나님께로부터 온다고 가르친다.

하나님의 권세는 고유적인 것이며, 하나님은 인간 통치자들에게 권세를 부여해 주신다 (롬 13: 1).

권세에 대한 예수님의 주장은 지상에서 아버지께로부터 받으신 권세뿐 아니라, 하나님으로서의 고유한 권세를 가지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그 같은 권세를 가지고 예수님은 몸의 질병을 치유하고 악령을 쫓아내셨을 뿐 아니라, 죄를 사해주시는 일을 하셨다.


2장 11절:


  • ●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그때까지, 중풍병자는 신학적 논쟁의 방관자였다.

이제 예수님은 관심을 중풍병자에게 돌리셨다. 

예수님은 그에게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명하였다.


  • ●   일어나- 우리는 그 병자가 걷지 못하게 된 후 얼마나 오랫동안 지난 지를 알지 못한다.  
  • ●   예수님은 불가능 해 보이는 일을 하도록 명하셨던 것이다.
  • ●   네 상을 가지고 - 그것은 그 사람이 치유되었다는 증거 가 되었다. 그의 질병의 상징은 그의 치료의 상징이 되어야 하였다.
  • ●   집으로 가라 – 그 사람은 지체 부자유자로 생활하던 집이 있었다.  친구들은 집에 있는 그를 데리고 왔던 것이다. 이제 그는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 소망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이 구절들은 예수님의 신성을 어느 정도까지 보여주고 있는가?  당신은 예수님이 죄를 사해 주시는 권세와 몸의 질병을 치유하는 권세를 똑같이 갖고 계심을 어떻게 확신하고 있는가?


증거된 권세 (마가복음 2장 12절) 


2장 12절


  • ●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그들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중풍병자는 곧 예수님께서 그에게 명하신 그대로 행하였다.

그는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들 앞에서 나감으로, 그의 병이 고침을 받은 것을 증거하였다.

그의 친구들이 그를 데리고 예수님께로 왔을 때, 군중들은 길을 내주지 않았을지라도, 이제 그가 고침을 받고 나갈 때는 길이 곧 열렸던 것을 알 수 있다.

아마도, 그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집으로 돌아간 것으로 보인다.

마가는 그 기간 동안에 일어난 일들은 자세히 기록하지 않고, 군중들이 목격하고 나타낸 반응에 관심을 두고 기록하였다.

  • ●   그들이 다 놀라 –사람들이 보인 감정적인 반응은 초자연적인 기적을 목격한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는 놀라움과 기쁨이었다.
  • ●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 것은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이 나타날 때 사람들이 나타내는 영적 반응이 되고 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하나님의 위대 하심과 선하심을 찬양하는 것이다.  예배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 하셨을 때 그의 백성들이 나타내는 적절한 반응이 되고 있다.
  • ●   우리가 노무지 이런 일을 보지 못하였다 -그들은 중풍병자가 즉시 그리고 온전히 치유 받는 것을 이전에 보지 못하였다. 흥미로운 일은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의 제자로 나중에 그 같은 치유를 한 것이다 (행 3 : 1-10 참조). 그때에도 사람들은 하나님께 경외감과 찬양을 드렸다.


말씀을 나의 상황에 적용하기:


  • ●   예수님은 그에게로 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죄를 사함 받는 은혜를 베풀어주신다.
  • ●   오직 하나님만이 죄를 사해 주실 수 있다.   
  • ●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수님은 죄를 사해 주시며 치유해 주실 수 있는 권세를 갖고 계시다.
  • ●   죄를 사해 주시며 치유해 주실 수 있는 예수님의 권세를 우리가 그를 경외하고 찬양하며 예배하는 이유의 하나가 되고 있다.



죄와 질병을 이기는 예수님의 권세는 오늘 날 당신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