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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열매 - 제 6과 - 2018년 10월 7일 주일 장년성경연구 - 갈라디아서 5장 13 -26절

글쓴이 : 강호길 날짜 : 2018-10-01 (월) 23:48 조회 : 33

장년성경연구 교사용 교안

2018년 10월 7일 주일 용  


제 6 과



참된 열매



학습구절: 갈라디아서 5장 13 -26절


성경진리:

한 사람이 구원을 받은 증거는 그 사람의 경건한 인격에서 입증된다.   


주요교리:  구 원

믿는 자들은 그들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의 임재와 능력을 통해 도덕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자라나며 성숙해 질 수 있다 (빌 1: 6).  


암송구절:  갈라디아서 5장 22-23절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But the fruit of the Spirit is love, joy, peace, forbearance, faithfulness, gentleness and self-control. Against such things there is no law.” 



시작하는 글:


우리가 추운 겨울 날에 밖에 나가려고 할 때,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알고 있다.

두꺼운 외투, 목도리, 모자, 장갑 등이 그 단서가 되고 있다.

추운 날씨에 밖에 나가려는 우리의 의도를 보여주는 증거는 분명하다.

비슷한 방식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 들인 증거는 분명하게 나타나야 한다.

한 사람이 구원을 받은 것을 나타내는 증거의 하나는 구원을 얻은 후에 형성되는 경건한 품성이 되고 있다.

복음을 믿고 순종하면, 성령님께서는 즉시 믿는 자의 삶 속에 들어오셔서 믿는 자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시키는 일을 시작하신다.


구원을 받은 후에 나의 삶은 어떻게 변화되었고 변화되고 있는가



본문배경설명                                       


갈라디아서 5장 1절부터 26절까지

갈라디아서의 처음 네 장에서, 바울은 은혜에 의하여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는 교리적 기초를 확립하였다.

바울의 가르친 구원의 교리는, 믿음에다 율법의 행위를 더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친 유대주의자들의 것과는 대조를 이루고 있다.  

갈라디아서의 마지막 부분은 (갈 5: 1 -6: 18) 바울이 가르친 교리를 실제로 적용하는 부분이 되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의 사역으로 변화를 받는 사람들은 경건한 품격의 증거가 나타난다.

사도 바울은 영적 자유는 율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은혜로 존재한다고 강한 어조로 주장하였다 (1: 1 ~ 12).

율법주의는 불필요할 뿐 아니라, 율법주의는 노예로 만든다.

율법을 지킬 의무가 없다는 말은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유를 얻었다는 뜻이 아니다 (5: 13-15).

자유의 남용은 교회를 분열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목적으로 사랑을 고양시켰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고 하였다.

은혜는 그리스도인의 품격을 갖게 하는 사랑으로 귀결되고 있다.

한 사람의 행동에는 여러 가지 다른 영향력이 작용하게 마련이다.

율법주의적 마음에는 이기적인 동기가 생겨 주님과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자기의 이익을 도모하는 도구로 삼으려고 한다.

그러나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행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다른 사람들의 삶을 향상시키는 방식으로 생활하게 된다 (5: 16-18).

바울은 그리스도에 의해 변화되지 않은 사람의 특성을 나타내는 몇 가지 구체적인 행동들을 열거하였다 (5: 19 ~ 21).


학습구절 연구 


자유를 얻은 삶 (갈라디아서 5장 13 -15절)


5장 13절: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에게 “자유를 주셨(다)”는 사실을 밝힌 후에 (갈 5: 1), 바울은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라)”고 경고하였다.

기회”로 번역된 용어는 공격을 가하는 군사 작전 기지의 뜻이 담겨 있다.

그러니까. 그 말은 “시작점” 혹은 “특정한 때”를 뜻할 수 있다.

육체로 번역 된 헬라어 단어는, 문맥에 따라, 인간이나 인간의 몸 혹은 육신을 가리켰다.

육신이라는 말은 ‘타락한 인간의 본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특별히 ‘죄의 본성’이 강조되고 있다.

그러니까,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라)”는 말은 ‘죄를 짓는 기회로 삼지 말라’는 뜻이 되고 있다.

갈라디아의 어떤 성도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죄를 용서받을 수 때문에 혹은 율법으로부터 자유 하게 되었기 때문에 마음대로 죄를 지어도 된다고 생각을 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바울은 그들에게 그들의 자유를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는 기회로 삼으라고 하였다.  

바울은 “사랑”이라는 말을 “아가페”라는 헬라어로 표기하였는데, 그 용어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키는 것으로, 희생적인 것 및 다른 사람의 최상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 되고 있다.

그것은 감정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의도적인 선택에 의한 것이다.

믿는 자들은 의도적인 선한 뜻으로, 서로 섬겨야 한다.

섬기다”로 번역된 헬라어는 ‘노예의 의무를 다하다’ 혹은 ‘헌신하다’는 뜻을 담고 있다.

바울은 신자들이 다시 율법주의로 돌아가 율법의 노예가 되기보다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서로를 섬겨야 함을 강조하기 위해 그 용어를 선택했을 것으로 보인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 6절에서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고 하였다.


5장 14절: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하라 하신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우리는 바울이 율법을 부정해 버리려고 하지 않았던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유대주의자들은 율법의 본질과 목적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율법을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수단과 방법으로 사용하였다.

그런데, 바울은 레위기 19장 18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다)”고 하였다.

그것은 율법의 본래의 의도와 목적을 가리켜 한 말이 되고 있다.

그것은 또한 율법 전체를 요약한 말이다.

예수님도 율법에 대해 그 같은 뜻과 목적으로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율법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요약하셨다 (신 6: 5; 레 19: 18; 마 22: 34 -40; 막 12: 28 -34; 눅 10: 25 -28).

그리고 그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다의 강령이니라”고 하셨다.

유대인들은 일반적으로 이웃이라는 말을 다른 유대인으로 해석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웃”을 한 사람이 삶 가운데서  만난 사람, 특별히 도움이 필요한 사람으로 재정의하셨다 (눅 10: 25 -37 참조).  

이웃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할 때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5장 15절: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타락한 인간의 본성으로 인하여, 사랑이 없으면, 사람들은 대개의 경우 다른 사람들을 자기의 욕심을 채우는 대상으로 삼는다.

또한 보통 사람들은 자유를 “육체의 욕심”을 이루기 위한 방편으로 사용하려고 한다.

결과적으로, 사람들은 서로 갈라져서 미워하고 싸운다.

갈라디아 성도들 사이에서도 그 같은 상황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고 하였다.   

물다”로 번역된 헬라어는 찢고 상처를 낸다는 뜻을 담고 있다.

먹다”로 번역된 말은 먹이로 삼다라는 뜻이 되고 있다.  

그 두 단어는 복합적으로 야생 동물들이 사투(死鬪)를 벌이고 있는 장면을 묘사해 주었다.  

사나운 야생동물이 그같이 싸우면, 둘이 다 함께 죽고 만다.

그 같은 위험은 실질적인 것이었다.

갈라디아에있는 신앙 공동체도 성도들이 서로 싸우면 신앙공동체 자체가 파괴될 수 있었다.


성령님의 통제와 인도를 받는 삶 (갈라디아서 5장 16 -18절)


5장 16절: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내가 이르노니”라는 말은 뒤에 나오는 바울의 명령을 강조하는 뜻을 담고 있다.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성령을 따라 행하라”고 권면하였다.

행하라” 혹은 “걸으라”라는 명령은 “살라”라는 뜻의 히브리식 표현이 되고 있다.  

시제는 지속적인 행동을 뜻하고 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육신의 소욕에 따라 행한다.

그러나 믿는 자들은 성령님의 지시와 인도하심을 따라 계속 걸어 간다.

그런 다음 바울은 말하기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고 하였다.

인간의 욕망은, 상황에 따라, 선한 것이 될 수도 있고 악한 것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은 타락한 인간의 본성으로 인하여 죄 된 육신의 욕망에 이끌린다.

그렇지만, 성령님을 따라 행하면, 성령님은 육신의 죄 된 욕망을 물리칠 수 있는 힘을 주신다.


5장 17절: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말하기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한다)”고 하였다.

바꾸어 말하면, 육체가 바라는 것은 성령님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바라시는 것과 적대적인 것이 되고 있다.

육체의 소욕”이란 말은 육체 혹은 육신이 바라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그 말은 헬라어로 “격렬하게 갈망하다”는 뜻이 되고 있다.

성령과 육체의 소욕은 믿는 자들의 삶 속에서 “서로 대적함으로” 계속 싸움이 일어나고 있다.

사도 바울은 자기 속에서 성령과 육체의 소욕이 싸우는 것을 직접 경험하였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그 같은 상태를 다음과 같은 말로 표현하였다 (롬 7: 22 -23).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 잡아 오는 것을 보는 도다.”

바울은 자신의 힘만으로는 죄를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던 것이다.

육체와 성령은 “서로 대적(하고 있다).”  

육신의 힘이 더 강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한다.

길이 두 갈래로 갈릴 때, 우리는 두 길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여야 한다.  

우리는 두 길을 동시에 걸어갈 수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동시에 서로 적대되는 성령과 육체를 따라 걸어갈 수 없다.

그러나, 성령님은 우리가 두 갈래 길에 설 때에, 우리에게 바른 방향을 가리켜 주신다.

성령님은 또한 바른 길로 걸어갈 수 있는 힘을 우리에게 주신다.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얻었다고 해서 육신의 죄 성이 근절되어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육신의 지배를 받으면, 육체의 소욕을 따르게 된다.

성화는 믿는 자가 매일의 삶 속에서 성령을 따라 행하며 능력을 힘입음으로 영적 성장과 변화를 이루는 과정이다.


5장 18절: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18 절에서, 바울은 성도들이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며 그의 능력을 지속적으로 의존하면, 율법의 종이 되는 대신에 자유를 경험하게 되는 것을 강조하였다.

유대주의자들은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육체의 소욕을 극복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 율법은 무력하여 인간의 죄의 본성을 억제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롬 7: 7 -8, 14 -25 참조).

갈라디아에있는 거짓 교사들이 극찬하고 있는 율법주의는 올바른 방법은 밝혀주었지만, 올바르게 행할 힘은 주지 못했다.


버려야 할 육체의 일들 (갈라디아서 5장 19 -21절)


5장 19 -21절: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바울은 “육체의 일”과 “성령의 열매”(22 -23절)을 대조시켜, 육체의 소욕에 이끌리어 사는 삶과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사는 삶의 차이를 설명하였다.

바울은 말하기를, 육체의 일은 “분명하(다)”고 하였다.

그런 다음 그는 “육체의 일”로 먼저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의 세 가지를 들었다.   

이들 세 가지는 모두 성적인 죄와 관계되고 있는 것들이다.

19절에 열거된 일들은 성에 대한 하나님의 높은 의도를 악용한 것이다.

음행”은 간음과 근친상간 및 동성애 등을 포함하여, 성적으로 부도덕하고 수치스러운 행위를 가리키고 있다.

율법은 간음을 금하고 있다 (출 20: 14).

간음은 결혼한 부부가 배우자에게 성적으로 불성실한 것을 가리키고 있다.

예수님은 음욕을 품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다고 하셨다 (마 5: 28).  

더러운 것”은 사람을 의식적으로 부정하게 만드는 종류의 타락한 성적 행위를 가리킨다.

더러운 것이란 말은 특별히 성적인 죄의 윤리적인 면을 가리키고 있다.

호색”은 성적 방종을 의미한다.

바울이 그 다음으로 열거한 것은 “우상 숭배 “주술”이다.

그 두 가지는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아니라, 피조물로 대표되는 초자연적인 힘을 섬기고 있는 점에서 서로 밀접하게 관계되고 있다.

20절의 나머지 부분은 육체의 소욕에 의해 생기는 사회적 죄를 열거하고 있다.

바울은 먼저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를 열거하였는데, 그들은 차례로 적개심, 당파심, 그리고 남의 것을 탐내는 것이 요인이 되고 있다.

분냄”은 감정이 비이성적으로 표출되는 것으로 파괴적으로 사용되기 쉽다.

사도 바울은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고 하였다 (엡 4: 26 -27).  

당 짓는 것”과 “분열함” 그리고 “이단”은 서로 비슷한 뜻의 말로, 사람들을 갈라지게 만드는 야심 혹은 이기심을 나타내고 있다.

그것들은 신앙공동체를 갈라놓은 파괴적인 요인들이 되고 있다.

바울은 또한 21절에서 “투기(심)”을 경고하였는데, 성경말씀을 읽으면, 가장 무서운 죄들은 투기심에서 비롯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래서 잠언은 “분은 잔인하고 노는 창수 같거니와 투기 앞에야 누가 서리요”라고 한다 (잠 27: 4).

투기는 다른 사람의 부나 덕성 혹은 재능에 대해 악 감정을 품을 때 생긴다.

바울은 또한 술 취함과 방탕함을 경계하였는데, 그것들은 무절제한 자유나 자유의 남용을 가리키고 있다.

육체의 욕심을 따라 그같이 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다.


열매 맺는 삶 (갈라디아서 5장 22 -26절)


5장 22 -23절: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사도 바울은 “육체의 일” (19절)과 “성령의 열매를 대조시켰다.

곡식이든 과일 나무든 간에, “열매”는 하루 밤 사이에 열리는 것이 아니다.

나무나 곡식이 열매를 맺게 하려면, 오랜 시간에 걸쳐 경작하고 제배하며 가꾸는 일이 필요할 뿐 아니라, 햇빛과 비와 토양의 작용에 의해 건강하게 자라나는 과정이 필요하다.

성령의 열매도 그같이 믿는 자가, 혹은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님의 도움으로 믿음이 건강하고 튼튼하게 자라나는 과정이 필요하다.

오늘날 성령님에 대해 공부를 할 때, 많은 교회들이 성령의 은사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우리는 성령의 열매에도 똑같이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이는 성령의 열매는 성령의 은사가 효력을 발휘하고 효과를 나타낼 수 있는 믿음의 자질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3차원적인 관계 속에서 살고 있다.  

하나는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이고 (The Upward Dimension), 다른 하나는 다른 사람들과의 수평적인 관계이며 (The Outward Dimension), 세 번째는 자신과의 내적인 관계이다 (The Inward Dimension).

사도 바울이 열거한 아홉 가지 성령의 열매들은 세 개의 그룹으로 나뉘어 믿음의 삶의 세 가지 차원과 관계되고 있다.


수직적인 관계에서 맺히는 열매들 – 사랑, 희락, 화평

사랑 – 성령님의 임재와 사역으로 열리는 첫 번째의 열매는 “사랑”이다.

사랑이 목록의 맨 윗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사랑의 중요성과 다른 여덟 가지 열매와의 관계를 반영해 주고 있다.

사랑은 나머지 다른 열매들의 기본이 되며 하나님의 은사들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되고 있다 (고전 12: 31; 13: 13).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요일 4: 16).

예수님이 죄인들을 위해 십자에 달려 죽으신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완전한 예가 되고 있다.

바울은 “아가페”라는 독특한 헬라어를 사용하여,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종류의 사랑을 표현하였다.

아가페의 사랑은 남녀간의 사랑인 “에로스”나 친구간의 사랑인 “필리아” 보다 더 높은 차원의 것이 되고 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은 우리들로 하여금 자기를 부인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그들이 누구이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또는 어떻게 생겼든지 관계없이, 사랑을 베풀게 해 준다.

희락 – 희락은 상황과 여건에 근거한 기쁨 이상의 것이 되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과 믿음의 관계를 맺을 때 그의 은혜로 생기게 되는 마음의 만족감이다. 

화평 - 화평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누리게 되는 바른 관계와 상태를 나타내 주는 용어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5장 1절에서,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을 누리자”고 하였다.

하나님과 화평케 된 믿는 자들은 다른 사람들과 화평한 관계를 누리게 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들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화목하게 하시는 직분을 주셨(다)” (고후 5: 18).


수평적인 관계에서 열리는 열매들 –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오래 참음 – ‘오래 참는다’는 말은 어려운 여건이나 상황 혹은 까다로운 사람에 대하여 참고 견딜 수 있는 내적인 힘이나 성품을 가리킨다.

오래 참는 성도는 화나 분을 쉽게 내지 않는다.

오래 참음”에 대해 우리가 유의해야 될 것은 하나님께서 죄인들에 대하여 오래 참으신다는 사실이다.

자비 – 자비는 관용적이고도 동정에 찬 마음으로 살아가는 힘을 뜻한다.

오래 참음과 자비는 밀접한 관계가 되고 있다.

하나님은 자비하시기 때문에 오래 참으신다.

양선 –양선은 선한 것을 사랑하는 자질이다.

양선은 다른 사람들에게 악이 아니라, 선을 행하는 성향을 의미한다.


자신과의 내적인 관계에서 열리는 열매들 – 충성, 온유, 절제

충성 – 충성이란 말은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에 대한 신뢰와 충성심을 의미한다.

여기서 그 말은 ‘신실함’으로 번역될 수 있다.

충성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확신감을 나타내고 있다.

온유 – 온유함은 종종 오해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온유한 사람은 쉽게 다를 수 있는 사람으로 생각한다.  

헬라어로 온유하다는 말은 자제력이 강한 사람을 뜻하고 있다.

강한 영적 힘은 하나님께 순종할 때 온다.

온유는 가르침을 잘 듣는 마음이 될 수 있다.

온유한 마음은 완고하거나 교만한 마음과는 정 반대되는 성품이다.

절제 – 절제는 힘을 의미하는 어원에서 나온 말이다.

그 말은 좋은 것이라도 적당하게 사용할 수 있으며, 해가 되는 것은 삼갈 수 있는 힘, 즉 자제력을 가리킨다.


바울은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는 말로, 그 모든 것들이 율법과 상치되지 않는 점을 강조하였다.

성령의 열매는 율법이 성취 할 수 없는 것을 성취할 수 있다.


5장 24절: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믿는 사람들은 “그리스도 예수”께 속한 자들이다.

믿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와 동일시 하는 최상의 방법은 믿음과 상징적인 방법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를 믿고 따르려는 사람들에게,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하셨다 (눅 9; 23).

자신에 대해 죽는 것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중요한 주제이다.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고 믿음의 고백을 하였다 (갈 2: 20).

믿는 자가 받는 “침례”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서 장사되었다가 부활의 주님과 함께 다시 살아날 것을 상징하는 의식이다.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은, 믿는 자들이 침례를 받았을 때, “죄에 대하여 죽은 (사실)”을 밝혔는데  (롬 6: 3), 본문에서는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고 하였다.

그 말이 나타내고 있는 핵심적인 뜻은 자기 중심의 삶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것이 되고 있다.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는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자신의 말로 설명해 보자.


5장 25-26절: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믿는 자들 안에 성령님께서 거하심으로, 믿는 자들은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포함시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성령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으로 살아가면, “성령으로 행할지니”라고 하였다.

“성령으로 행하다”로 번역된 말은 행진하는 군인들이 대열을 지킨다는 뜻이 되고 있다.

 여기서 ‘성령으로 산다’는 말은 내적 믿음의 원리가 되고 있는 반면에, ‘성령으로 행한다’는 말은 순종의 행위가 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성령으로 행(함으로)”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라”고 하였다.  


말씀을 나의 상황에 적용하기:


●  구원의 삶은 믿는 자들에게 다른 사람들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준다.

●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살기 위해 매일 성령을 의지해야 한다.

●  죄는 항상 그 본체가 드러나게 마련이며, 심판을 받게 된다.

●  믿는 자들은 그들의 삶에서 정직과 정의가 특징이 나타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