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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은혜 - 제 2과 - 2018년 9월 9일 주일 장년성경연구 - 갈라디아서 2장 11 -21절

글쓴이 : 강호길 날짜 : 2018-09-02 (일) 12:26 조회 : 44

장년성경연구 교사용 교안


2018년 9월 9일 주일 용  


제 2과



참된 은혜



학습구절: 갈라디아서 2장 11 -21절


성경진리:

참된 은혜는 사람들을 차별하거나 구별하지 않는다.


주요교리:  칭의(의롭다 함을 얻다)  

칭의 (justification)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공의의 원칙에 따라 그의 은혜로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죄인들을 용서해 주시는 것이다 (갈 2: 16).


암송구절:  갈라디아서 2장 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I have been crucified with Christ and I no longer live, but Christ lives in me.

The life I now live in the body, I live by faith in the Son of God, who loved me and gave himself for me.      



시작하는 글:


어떤 단체나 조직에 속하려면 갖추어야 할 조건들이 있다.

군대는 신병 모집에 연령 조건을 설정하고 있다.

변호사들이 변호사 협회에 가입하려면 변호사 자격 시험에 통과해야 한다.

어떤 조직체나 단체들은 회원들에게 회비를 요구한다.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것은 다르다.

은혜의 복음이 밝혀주고 있는 기본적인 뜻은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그의 가족으로 환영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에게 응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제외시키지 않으신다.



어떤 이유로 인해 어떤 단체나 그룹에 들어가지 못한 적이 있는가? 그들의 가입 조건들은 그들의 존재에 대한 어떤 가치나 목적들을 나타내고 있는가?




본문배경설명


갈라디아서 1장 11절부터 2장 21절까지

   갈라디아서 1장 11절부터 2장 21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도로 말할 수 있는 자신의 권한을 분명하게 밝혔다.

오늘의 본문은 자서전적인 바울의 자기 변호에 해당되고 있다.

바울은 그의 사도직의 타당성에 대한 질문과 비난에 대해 답변을 하였다.

   갈라디아서 1장 11절부터 24절까지에서, 바울은 자기가 사도의 직분을 받게 된 연유(緣由)를 설명하였다.

그것은 직접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계시로 받았다.

바울은 그 같은 사실을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말로 표현하였다 (갈 1: 12).

그 말은 그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겪었던 일을 가리켰을 수 있다 (행 9: 3 -6). 

바울이 사도의 직분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다는 말은 사람들에게서 받은 것이라는 그의 적대자들의 주장을 반박하는 것이 되고 있다.

   바울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예루살렘을 방문했던 때의 이야기를 하였다.

그때 사도들을 포함하여 교회 지도자들은 바울의 사도적 권위를 인정하였다 (2: 1- 10).

바울의 사도의 권위는 그들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었지만, 그들은 바울의 사역의 결과를 그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의 증거로 보았다.

많은 성경학자들은 바울이 여기서 언급한 방문을 예루살렘 공회 때의 것으로 보고 있다 (사도행전 15장 참조).

바울과 바나바는 이방인 신자들을 교회로 완전히 받아 들어야 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 모임에서 바울은 구원을 얻는 데는 은혜에 더하여 율법을 지키는 일이 요구된다는 주장으로 이방인 지역의 교회들을 소란케 하고 있던 유대주의자들을 정면으로 대결하였다.

   바울의 사도직이 과감하게 인정된 또 다른 일이 갈라디아서 2장 11절부터 21절에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바울은 이방인 신자들을 위선적으로 대하는 베드로의 이중적인 태도에 정면으로 도전하였다.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로 묘사되고 있는, 예루살렘 교회의 대표자들이 안다옥에 오기 전까지는 베드로는 드러내놓고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었다.

그러나, 그들이 오자 그들을 두려워하여 그 자리를 떠났다.    

바울은 모든 신자들을 구별하거나 차별하지 않고 동등하게 대하는 은혜의 복음을 옹호하였다.

그는 예루살렘 교회의 존경 받는 지도자이자에 대한 정당한 도전이 자신의 사도직을 확증해 주는 것으로 믿었다.

바울은 모든 사람들이 얻을 수 있는 은혜의 복음을 옹호하였다.



학습구절 연구


진리로 맞서다 (갈라디아서 2장 11 -14절)

2: 11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 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

2: 12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2: 13  남은 유대인들로 그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2: 14  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2장 11절 – 로마제국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가 되었던  시리아의 “안디옥”은 초대 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곳에 개척된 교회는 이방인 지역으로 펼쳐 나아가는 기독교 운동의 진원지(震源地)가 되었다.

이방인 인구가 지배적인 구조를 이루고 있던 그 지역에 많은 수의 유대인들이 섞여 살았다.

두 그룹은 모두 교회 내에서 서로 잘 어울려 지낸 것이 분명하다.

안디옥 교회는 바울과 바나바를 선교지로 파송하는 일을 하였다 (행 13: 1 -3).

안디옥 교회의 신자들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모두가, 최초로 “그리스도인”이라 불려지게 되었다 (행 11: 26).

게바”(베드로)가 안디옥 교회를 방문하였는데, 그때 바울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다).”   

그 말은 베드로와 여러 사람 앞에서 책망하였다는 뜻이다.

그 이유는 2장 12절에 나와있다.

사도행전 10장에 기록된 대로, 이전에 베드로는 환상과 고넬료와의 만남을 통해 복음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라는 중요한 영적 교훈을 배웠다.

그때 그는 선포하기를,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고 하였다 (행 10: 34 -35).

그때부터 베드로는 이방인들과의 교제를 시작하였으며, 교제의 주된 자리는 식탁이었다.

식탁에 함께 앉아 음식을 먹는 것은 서로 받아들이며 인정하는 것을 나타냈다.

그러나,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사람들이” 안디옥에 도착한 일은 베드로의 입장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야고보는 당시 예루살렘 교회의 담임 목사였다.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이 도착하자, 베드로는 이방인 신자들과 함께 먹다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그 자리를 떠났다.

예루살렘에서 온 유태계 기독교인들은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식사를 하는 것에 대해, 비록 그들이 기독교인들일지라도, 눈살을 찌푸렸을 것이 분명하다.  

무엇이 베드로를 그같이 바꾸어 놓았는가?

이는 베들로가 유대계 형제들을 “두려워하여” 그같이 되었다.

할례자들” 혹은 “할례당”이라는 말은 유대주의자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율법을 준수할 것을 요구하는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 되고 있다.

베드로는 바울이 전하는 복음에 동조한 것으로 인해 예루살렘에서 그들 할례자들로부터 위협과  도전을 받았을 수 있다.  

2장 13절 – 바울은 베드로가 행한 일을 “외식”으로 단정하였다.

당시 외식이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가면을 쓰고 무대에 나와 연출하는 ‘연극 배우’를 가리켰다.

베드로는 말과 행동이 달랐던 것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베드로의 행동으로 인해 다른 유대인 신자들도 그 위선에 합류하게 된 것이었다.

그것은 사이가 좋던 교회가 서로 갈라지게 할 수 있는 잠재적인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복음의 진리를 타협하거나 절충시키는 일은 교회를 약하게 만든다.

그 결과의 하나는 불신자들에게 전도하려는 열정이 식어지는 것이다.

바울을 더욱 슬프게 만든 것은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는 말에서 나타나고 있듯이 바나바도 그 같은 위선에 이끌린 것이다.  

바나바는 이방인 중심지였던 “구브로 (섬)에서 난 레위족 사람”으로, 본래 이름은 “요셉”이었는데 사도들에게서 ‘격려의 아들’이라는 뜻인 “바나바”로 불렸다 (행 4: 36).

안디옥에서 많은 이방인들이 복음을 듣고 주께로 돌아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예루살렘 교회는 그곳의 상황을 평가하도록 바나바를 안디옥으로 보내었다.

그는 일어나고 있는 일을 “하나님의 은혜”로 알고 기뻐하며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고 권하였다 (행 11: 22 -23).

게다가, 그는 바울을 찾으러 다소로 가서 그를 만나 안디옥으로 데리고 와서 그와 함께 복음을 갓 믿기 시작한 초신자들을 가르치며 훈련시키는 사역을 하였다. (행 11 : 25 - 26).

바나바는 안다옥 교회가 건강하고도 튼튼한 교회로 성장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맡아 크게 공헌하였다. 

그는 제 일차 선교여행 때 바울과 동행하여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행 13: 1 -3).

그런데 슬프게도, 바나바는 안디옥에 온 베드로와 다른 유대인 믿는 자들에게 이방인 신자들과의 식탁 교제를 계속하도록 권면하지 못하고 도리어 그들의 외식에 이끌렸던 것이다.  

바나바가 외식에 끌렸던 일은 바울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을 것이 분명하다.

우리가 종종 하는 것처럼, 바나바는 시험에 걸려 넘어졌던 것이다.

감사하게도, 주님은 복음 사역에 그를 계속 사용해 주셨다 (행 15: 26 -31 참조).

이 사실은 우리가 믿음 생활을 하다 넘어질 때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소망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복음의 진리를 타협하거나 절충시키는 일은 교회를 약하게 만든다.  심각한 결과의 하나는 불신자들에게 전도하려는 열정이 식어지는 것이다.



2장 14절 - 바울은 유대인 신자들이 이방인 신자들과의 식탁 교제를 하다가 예루살렘에서 온 다른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그 자리를 떠나 물러나는 것을 보고, 그 같은 위선적인 행동을 “복음의 진리”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보았다.

복음의 진리”라는 말로 요약된 복음의 핵심 메시지는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바울은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신자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베드로를 책망하였다.

바울의 행동은 사도로서의 그의 권위뿐 아니라, 그가 베드로와 다른 열 한 사도들과 동등하며 독립적인 위치에 있었던 나타내 주고 있다.

바울은 유대인 신자들과 이방인 신자들 사이의 친교 문제에 관해 베드로에게 도전 했던 것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로, 베드로는 기독교 운동의 지도자 격인 위치에 있었으며 큰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둘째로, 베드로가 이방인 신자들로부터 자신을 멀리한 것은 기독교 신앙에서 율법주의의 존재에 대한 암묵적(暗默的)인 인정으로 간주 될 수 있었다.

셋째로, 이방인들 가운데서 그가 행한 사역을 감안할 때, 베드로는 자신의 현재 행동이 옳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넷째로, 베드로가 복음의 진리를 고수 하지 않는 것은 바울이 선포 한 메시지 즉,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통해 은혜로 구원을 받으며 기독교 신앙 공동체 내에서 평등하다는 것을 분명하게 부인하는 일이 되었다.

바울이 도전하고 나선 것은 은혜의 복음의 기본 원칙에 관한 것이었다.

바울은 모든 자 앞에서 베드로(게바)에게 말하기를,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고 하였다고 하였다.

전반부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라고 한 말은 예루살렘으로부터 유대주의자 신자들이 안디옥에 오기 전까지 베드로가 행했던 일을 언급한 것이다.

베드로는 출생과 양육 그리고 성장 배경으로 순수 유대인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 자유로운 관계를 가졌다.  

엄밀한 의미에서, 베드로는 유대인답게 살지 않았다.

말하자면, 베드로는 이방인들의 음식 풍습을 받아들였고 그들을 동등하게 대하였다.

후반부의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라는 말은 야고보에게서 온 사람들이 도착한 후에 베드로의 행동에 급격한 변화가 생긴 것을 가리키고 있다.

억지로”라고 번역된 용어는 강요보다는 본으로 영향력을 끼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이방인 신자들과 식탁교제를 나누는 것을 중단하기로 한 베드로의 결정은 이방인 신자들을 곤란하고도 비하시키는 입장에 처하게 만들었다.

실제로, 이방인 신자들에게 유대인의 율법을 따르도록 요구하려는 시도는 율법을 지키는 유대인 신자들이 더 의롭고 하나님과 더 월등한 관계를 갖고 있는 반면에 이방인 신자들은 여전히 죄인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었다.

베드로와 다른 유대인 기독교인들이 행한 일에서 바울이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이방인 신자들이 율법주의의 제약에서 벗어나게 되며 안디옥 교회가 하나가 되는 것이었다.  


은혜로 의롭게 되다 (갈라디아서 2장 15 -18절)

2: 15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2: 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2: 17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드러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2: 18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2장 15절 성경 주석가들은 바울이 사람들 앞에서 베드로를 책망한 일이 14 절에서 끝났느냐 혹은 15 -21절 단원까지 계속되고 있느냐에 대해 의견을 달리하고 있다.

어느 쪽이든, 바울은 자신의 믿음의 본질, 즉 자신이 믿고 전한 복음을 전했는데, 그것은 “구원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온다”는 메시지가 되고 있다.

우리”라는 말로, 바울은 베드로와 다른 유대인 신자들과 함께 자신을 포함 시켰다.

그들은 “본래 유대인”으로,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이었다.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라는 말에서는 율법과 히브리어 경전과 같은 유대인의 이점과 특권이  암시되고 있다.  

여호와 하나님은 특별한 방법으로 자신을 그들에게 계시해 주시고 가르쳐 주셨다.

그들은 “이방 죄인이 아니(었다).

이방 죄인”이라는 말은 유대인들이 일반적으로 유대인이 아닌 모든 사람을 가리켜 사용한 표현이 되고 있다.

바울은 그 말을 일반적인 유대인의 입장에서 사용한 것이지, 신자가 된 이후부터는 자신의 견해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2장 16절 - 이 구절은 갈라디아서에서 가장 위대하고 중요한 구절들 중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이 구절에서, 바울은 참된 복음이 무엇인지를 밝히며 전하려고 노력하였다.  

다시 말해서, 그는 복음의 핵심을 강조하였다.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보낸 그의 편지인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처음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단어 중 하나를 사용하여 구원의 한 측면을 설명하였다.

먼저 그는 유대주의 그리스도인들 혹은 율법주의 그리스도인들을 반박하여 말하기를,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라고 하였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로 “의롭게 되다”라는 중요한 용어를 사용하였다.  

그 말은 구원의 여러 가지 면의 경험을 묘사하기 위해 바울이 즐겨 썼던 단어들 중의 하나가 되고 있다.

헬라어로, 그 용어는 ‘바르게 되다,’ ‘불명예를 씻다,’ ‘무죄 판결을 받다,’ ‘인정을 받다,’ 혹은 ‘받아들여지다’ 등의 뜻이 되고 있다.

그 말은 “무죄하다 혹은 합당하다고 선언되다”는 뜻이 될 수 있다.  

모든 죄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정죄를 받고 심판을 받는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을 근거로 하여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그 앞에서 의롭다고 하시면, 그는 새로운 신분을 얻게 된다.

죄인인 모든 인간은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는 의롭게 될 수 없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고 단언하였다.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만으로만 가능하다고 하였다.

그래서 바울은 16절에서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다)”고 하였다.

그리고 우리들이 그같이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아무도 인간의 선행이나 노력으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과 선물이다.

2장 17 -18절 – 유대주의 혹은 율법주의를 주장하는 유대인 신자들은 은혜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구원의 교리를 공격함으로 자신들의 주장을 펼치려고 하였다. 

17절은 그 같은 예의 하나가 되고 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드러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라고 한 말은 유대주의자들이 공박한 말이 되고 있다.

그들은 주장하기를, 만일 한 사람이 은혜로 인하여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면, 그 사람을 죄를 짓는 자유를 얻었다는 것이다.

만일 율법이 없다면, 하나님께 대한 걷잡을 수 없는 불순종을 어떻게 막을 수 있겠는가?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그리스도를 죄를 짓게 만드는 분으로 만드는 일이 된다.

이에 대해 바울은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는 말로 단호하게 대답하였다.

은혜로 구원을 받은 신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그의 말씀에 기쁜 마음으로 순종한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신자들은 하나님께 순종하려는 동기가 생기게 된다.

바울은 갈라디아 신자들에게 그가 헐어버린 것으로 다시 돌아가지 말 것을 촉구하였다.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교리를 다시 지으려는 시도가 어떻게 바울을 “범법한 자”로 만드는 일이 되었을까?

바울에게 있어서, 은혜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하나의 진리와 법이 되었다.

그같이 강하게 붙들고 있는 진리에서 벗어나는 것은 그를 범법자로 만드는 일이 되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다 (갈라디아서 2장 19 -21절)

2: 19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2: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 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2: 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 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2장 19절 – 바울은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라는 말로, 자기가 복음을 믿고 기독교로 개종한 때를 “율법에 대하여 죽(은 것)”으로 언급하였다.

유대 가정에서 태어나서 율법의 교육을 철저하게 받으며 자라났던 바울은 육체적인 배경과 업적을 신뢰하며 자랑했었다.

그는 자신에 대해서 말하기를,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였다)”고 하였다 (빌 3: 5 -6).

그는 율법을 지킴으로 의를 이루려는 노력을 뛰어나게 잘 하였지만, 실패하였다.

그는 예수님을 믿고 그를 신뢰했을 때에만 구원을 얻을 수 있었다.

바울은 율법의 규범과 기준에 부응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결코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 그것을 성취할 수 없다는 사실을 더 절실하게 깨달았다.

율법에 대하여” 죽음으로, 바울은 “하나님에 대하여” 살 수 있었다.

그 말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것이 그리스도를 “죄를 짓게 하는 자”로 만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논박에 대한 대답이 되고 있다 (17 절).

율법에 대하여 죽고 그리스도께로 돌아왔을 때, 바울은,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이루려는 불가능한 시도로부터 그를 구출해주신, 하나님을 위해 살아갈 내적인 동기를 갖게 되었다.

2장 20절 –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혔나니”라는 말로, 율법에 대하여 죽은 자신의 체험을 설명하였다.

확실히 바울은 그리스도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믿음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처형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였다.

바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행하신 일을 계속되는 결과를 가진 과거의 행동으로 믿었다.

율법을 지킴으로써 자신의 구원을 얻으려는 그의 노력을 포기하는 순간,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무덤에 묻히신 것, 그리고 부활을 자신의 것으로 간주하였다.

자기의 삶에 대한 소유권과 통치권을 그리스도께 넘겨드렸으므로, 이제 그는 자신이 더 이상 사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다.

바울은 “육체 가운데 사는” 그의  삶을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으로 특징지었다.

그의 삶은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바울은 심지어 자기의 몸까지도 하나님께서 “값으로 산 것”이 되었다고 하였다 (고전 6: 20; 7: 23).

이 새로운 삶의 기초는 하나님을 위한 바울의 열성이 아니라, 그를 위한 예수님의 사랑과 희생이었다.

구원은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희생제물이 되신 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성취하신 완전한 일이 되고 있다.

구원은 하나님께 대한 사람들의 사랑이 아니라, 죄인들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 같은 이유로 인해, 갈라디아에서 다른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사람들을 행위에 기초한 구원의 관점으로 되돌리려고 노력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그들의 노력으로 의롭게 될 수 있다면, 예수님의 희생적인 죽음의 중요한 점은 무엇인가?



2장 21절 -바울은 행함으로 다시 돌아가 그것을 구원의 기초로 삼으려는 것을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려는 시도)”로 묘사하였다.  

‘폐하다’로 번역된 헬라어는 법적 무효를 선언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그 말에 담겨있는 의미는 무언가를 무효로 하거나 계약을 파기하는 것이 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을 자신의 노력과 행함으로 바꾸려고 하는 사람들은 은혜를 통해 가능한 것을 무효화하거나 파기하는 일을 하였다.

바울은 21 절 하반절에서 자신의 요점을 더욱 분명하게 하였다.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렇지 않지만, 바울은 선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고 하였다.

만일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노력으로 의롭게 될 수 있으면, 예수님의 희생적인 죽음의 중요한 점은 무엇인가?

그들이 율법을 다 지킬 수 있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될 수 있다면, 그들은 예수님의 속죄의 죽음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복음에다 율법을 추가시킴으로 복음을 왜곡시키는 사람들은 그들 안에서 역사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파기하고 있었다.



말씀을 나의 상황에 적용하기:


●  믿는 자들은 어떤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방해가 될 수 있는 개인적인 어떤 편견을 가지고 있는지 자신의 삶을 조심스럽게 살펴야 한다.

●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만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다.

●  우리의 삶을 예수님께 맡길 때 우리는 참된 삶과 목적을 발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