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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기본교리 (102) -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한 삶을 살라 - 2012년 4월 1일 주일 장년성경연구 제 5과 (누가복음 공부)

글쓴이 : 강호길 날짜 : 2013-09-13 (금) 10:23 조회 : 1459
2012년 4월 1일 주일
 
기독교의 기본 교리 (102):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한 삶을 살라
 
배경구절: 누가복음 6장 12절 – 8장 56절
학습구절: 누가복음 6장 27 -38, 41 -42, 46 -48절
 
이 과의 성경진리:
 
우리가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황금률을 실천하는 삶을 살기를 힘쓸 때,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는 삶이 된다.
 
시작하는 글:
 
복음서에서 ‘제자’라는 용어는 일반적으로 예수님으로부터 배우는 일에 헌신된 사람들을 가리는 말이다.
예수님의 지상 사역기간 동안에 큰 무리의 사람들이 그를 따랐다.
그러나 예수님은 숫 자에 큰 기대와 비중을 두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도리어 배우는 일에 헌신된 소수의 사람들을 중요하게 생각하시고 그들에게 큰기대와 관심을 두셨다.
그 대표적인 예가 예수님께서 자기를 따르는 많은 사람들 중에서 특별히 ‘열둘’을 택하여 사도로 삼으신 일을 들 수 있다.
예수님은 그들을 가르치고 훈련시켜서 자신의 사역을 공식적으로 대표하며 그 일을 수행하는 사역자의 직분을 맡게 하셨다 (막 3: 14).
인간을 구원하며 이 땅에 그의 나라를 건설하는 일의 성패가 그들에게 달렸으므로,
예수님이 그들을 선택하셨을 때 먼저 “밤이 맞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신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눅 6: 12).
그같이 중요한 사명을 맡은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고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그것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 시간과 정성과 있는 힘을 쏟아 제자들을 가르치시고 훈련시키신 목적이 되고 있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이 자기 중심적인 삶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추구하는 삶을 살기를 바라셨다.
예수님은 그같은 삶의 구체적인 방법으로 아가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을 드셨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기대하시고 요구하신 것은 그를 믿고 따르는 제자들은 가치적인 면에서 다른 사람들과 달라야 하며
윤리적인 면에서 세상사람들보다 차원이 높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또한 오늘 학과를 통해 어떻게 하는 것이 아가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인지를 구체적인 실례를 들어 우리를 가르치신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잘 듣고 배워서 그대로 실천하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되기를 바란다.
 
학습구절 연구
 
사랑으로 (누가복음 6장 27 -29, 35 -36 절)
 
6: 27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6: 28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6: 29    네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 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금하지 말라
6: 35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
6: 36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 같이 너희도 자비하라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라는 예수님의 첫 마디에서는 ‘듣는 일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우리에게 듣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는
사도 바울의 말만 들어도 잘 알 수 있다(롬 10: 17).
예수님은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고 하셨다 (마 13: 16).
야고보는 믿음의 성도들에게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라)”고 하였다 (약 1: 19).
그러나 ‘듣는 일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들어 보면 더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고 하셨다(눅 11: 28).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라고 하신 말씀도 ‘듣고 행하는 뜻’을 강하게 나타내고 있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다른 무엇보다 “사랑하라'고 하셨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사랑은 헬라어로 ‘아가페’인데, 희생적인 사랑 혹은 무조건적인 사랑을 뜻한다.
예수님은 구체적인 예를 드셔서 ‘희생적인 사랑’ 혹은 ‘무조건 적인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설명해 주셨다.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원수를 사랑하는 일’을 드셨다.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는 몇 가지 방법을 제시해 주셨다.   
첫째로,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라)”고 하셨다.
자기를 미워하거나 해하려는 사람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것이 아가페의 사랑이다.
두 번째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라)”고 하셨다.
잠언은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라는 말로 말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를 깨우쳐 주고 있다 (잠 18: 21).
 ‘저주’야 말로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해칠 수 있는 가장 강한 언어의 폭력이 되고 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같이 하는 사람을 위하여 축복하라고 하셨다.
문맥에 비추어볼 때 축복하라는 말은 ‘좋게 말하다’는 뜻으로, 좋은 점을 찾아서 칭찬하라는 말이다.
세 번째로, 예수님은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셨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당시의 문화권에서 사람들은 명예를 중요하게 여겼다.
명예를 생명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므로 명예가 손상을 입는 일은 참기힘든 수치와 굴욕으로 받아 들였다.
당시의 문화권에서 어떤 사람에게 뺨을 맞는 것은 가장 큰 경멸과 굴욕적인 일이 되었다.
그같은 상황에서 체면과 명예를 회복하는 방법은 복수를 하는 것이었다.
복수를 하지 못하면, 그것은 더 큰 굴욕적인 일이 되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 대(라)”고 가르치셨다.
마찬가지로,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금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것은 그의 제자들이 ‘보복의 법칙’이 아니라 ‘사랑의 법’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나타내는 방법이 되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힘이 없어서 혹은 자신이 당할 불이익 때문에 아니면 더 큰 이익을 얻기위해 보복하기를 포기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의 삶에서는 어떤 댓가를 바라는 동기가 아니라 바르게 행하며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려는 특징이 나타나야 됨을 강조하셨다.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빌리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의수(依數)히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빌리느니라”고 하셨다.
그같은 아가페 사랑의 삶을 살려면, 우리는 전적으로 예수님께 의존된 삶을 살아야 한다.
예수님은 먼저 제자들에게 그같은 삶의 본을 보여 주셨다.
그같은 삶을 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 13: 34).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성도들에게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한다(히 12: 2).
더우기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그같은 삶을 살 수 있는 힘을 주신다.
그같은 은혜를 체험했던 바울은 이같이 고백하였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 4: 13).
예수님은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라는 말씀으로 그같이 아가페의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사는 제자들에게 상급을 약속해 주셨다.
다른 무엇보다 그같은 희생적인 사랑을 실천하는 일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자녀가 됨을 나타내는 표가 되고 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는 예수님의 말씀도 그같은 뜻을 나타내고 있다.
예수님은 특별히 제자들에게 하나님은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신 분)"이 되신 것을 깨우쳐 주셨다. 
그리고 "아버지의 자비하심같이 너희도 자비라라"고 하셨다.
 
사심 없는 마음으로 (누가복음 6장 30 -34절)
 
6: 30    무릇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지 말며
6: 31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6: 32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느니라
6: 33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를 선대하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6: 34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빌리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의수(依數) 히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빌리느니라
 
인간의 삶 속에서 결코 만족시킬 수 없는 것이 ‘소유에 대한 욕심’이다.
그것은 세상 것들에 대한 '강한 집착력'이 되고 있다.
그런데 예수님은 소유물에 대해 지나치게 집착하거나 욕심을 부리지 말도록 제자들에게 가르치셨다.
“무릇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지 말며”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 같은 뜻을 나타내 주고 있다.
본문의 ‘구하는 자’나 ‘가져가는 자”로 지칭된 사람은 물건에 대해 욕심을 부리는 다른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그들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다.
잠언은 그같이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며 도와주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며 그 선행을 갚아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다.
6장 31절의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금언은 사람들에게 ’황금률’로 알려져 오고 있다.
유대인들은 이 황금률의 개념을 부정적인 방법으로 가르쳤다.
예를 들어, ‘다른 사람이 자기에게 하지 않기를 바라는 어떤 일이 있으면 그 사람에게 그 같은 일을 행하지 말라’고 그들은 가르쳤다.
당신이 다른 사람에게 해 되는 일을 하지 않으면 그 사람도 당신에게 해 되는 일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것을 긍정적이고도 적극적인 뜻으로 고쳐서 말씀하셨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율법은 하지 말라는 것에 초점이 멎추어지고 있는 반면에 복음은 하라는 것에 초점이 멎추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종종 인간관계를 부정적이거나 소극적인 방법으로 생각할 때가 많다.
예를 들어 어떤 한 성도는 말하기를 ‘불화를 자초하지 않는 최선의 방법은 사람들을 멀리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우리는 마음에 드는 사람이나 자기에게 잘 해주는 사람들만 골라서 좋은 인간관계를 맺고 잘 지내면서
나는 그같이 부정적인 방법으로 살지 않는다고 자랑할 수도 있다.
예수님은 그같이 행하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빌리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믿지 않는 사람들과 똑같은 방법으로 산다면, 그리스도인의 나은 점이 무엇일까?
다른 사람들도 하고 있는 일을 가지고 자랑하며 칭찬을 받으려고 할 수 있는가?
예수님은 그같은 질문으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들과 달라야 하며 그들 보다 높은 수준의 윤리적 기준을 가지고 살아야한다는 점을 강조하셨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깊은 관심으로 (누가복음 6장 37 -38, 41 -42절)
 
6: 37    비판치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6: 38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6: 41    어찌하여 형제의 문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목하는냐
6: 42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른 사람을 “비판”하거나 “정죄”하는 일을 하지 말라고 하셨다.
헬라어 원어로 그 말은 당시 예수님의 말씀을 청종하고 있던 사람들이 하고 있던 일,
즉 다른 사람을 비판하거나 정죄하는 일을 그쳐야 된다는 뜻을 나타내고 있다.
‘비판하지 말라’고 해서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른 사람을 심판하는 자리에 서지 말라고 경고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신자의 긍정적인 자세는 다른 사람을 판단하거나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해 주는 일이 되고 있다.
온전하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밖에 없으시고, 인간은 모두 흠과 결점이 많은 죄인들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세상에서 어느 누가 나는 아무 흠이나 결점 혹은 잘못이 없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종종 자신의 잘못을 변호하기 위해 혹은 자신을 잘 보이게 하려고 다른 사람을 비난하려고 들 때가 있다.
다른 사람을 비난함으로 자신의 책임을 전가시키려고 들 때도 있다.
우리는 또한 자신의 죄를 숨길 목적으로 다른 사람의 단점이나 잘못을 들추어 내며 과장하기도 한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자기 자신 보다는 다른 사람에게 더 깊은 관심을 가지고 행할 것을 가르치셨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비판치 말라”고 가르치실 때,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아니할 것이요”라는 말씀으로 그들도 다른 사람을 비판하면 그와 똑같은 비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셨다.
정죄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적용시키는 것과 같은 기준으로 우리를 심판하신다고 주님은 말씀하셨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판단하거나 정죄할 때, 그것은 실제로 우리 자신을 판단하며 정죄하는 일이 된다.
반대로,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일은 자신이 용서받는 일이 된다.
그러므로 믿음의 삶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베푸는 삶이다.
주님은 그같이 베푸는 삶을 사는 제자들에게 당시 시장에서 곡물을 파는 상인의 예를 들어 약속해 주셨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우리가 베푸는 삶을 살면,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은혜로 넘쳐 흐르게해 주실 것을 약속해 주셨다.
참된 제자의 삶은 또한 자신을 먼저 살피며 성찰하는 삶이다.
그래서 참된 제자는 다윗과 함께 다음과 같이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 (시 139: 23 -24).
그런데, 우리들 대부분은 자기의 그릇된 것이나 잘못은 보지 못하고 남의 결점이나 흠만 보고 책잡을 때가 많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같은 사실을 지적해 주시고 그같이 하는 사람들을 질책하시며 교훈해 주셨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우리는 먼저 “티”와 “들보” 사이의 차이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티로 번역된 ‘카르포스’라는 원어는 마른 왕겨의 아주 작은 조각을 가리킨다.
다른 한편, 들보로 번역된 ‘도오코스’라는 헬라어는 큰 통나무를 가리키는 용어였다.
예수님은 종종 자신이 가르치는 교훈의 뜻을 분명하게 밝히기 위해 과장법을 쓰셨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사람들은 눈 속에 작은 이물질만 들어가도 그 고통이 얼마나 심한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눈 속에 커다란 들보가 들어있다면, 볼수 없을 없을 뿐더러 그것을 참고 활동하는 것도 불가능하였다.
자신에게 들보처럼 큰 잘못이 있는 사람이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티처럼 작은 다른 사람의 과오만 보고 그것을 책잡으면서 빼내주겠다고 하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예수님은 그같이 하는 사람을 ‘외식하는 자’로 부르셨다.
그리고 그같이 하는 사람에게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고 하셨다.
 
순종함으로 (누가복음 6장 46 -48절)
 
6: 46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
6: 47    내게 나아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마다 누구와 같은 것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6: 48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으리니 큰 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히되 잘 지은 연고로
          능히 요동케 못하였거니와
 
본 단원은 ‘참된 믿음’ 혹은 ‘참된 제자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우리에게 밝혀주고 있다.
참된 제자의 삶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며, 그의 말씀을 행하는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음을 깨우쳐 주고 있다.
그런데 우리들 모두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일과 그를 구세주로 고백하는 일은 열심히 하면서도 그의 가르침을 행하는 순종은 잘 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믿음생활을 그같이 하는 우리들에게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고 질책하신다.
그같은 믿음생활은 참된 제자의 삶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야고보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도 순종하지 않는 믿음을 “행함이 없는믿음”이라고 하고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규정하였다 (약 2: 17).
예수님은 자기가 가르치는 말을 듣고 순종하는 제자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집을 짓는 사람의 예를 들어 설명해 주셨다.
그 건축자는 땅을 깊이 파서 집의 기초를 반석위에 세웠다.
그같이 기초를 반석위에 세운 집은 “큰 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딛(쳐도)” 무너지지 않고 견딜 수 있다.
이유는 기초가 튼튼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의 가르침을 듣고 행하는 제자의 삶을 튼튼한 기초위에다 지은 집에다 비기셨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삶의 튼튼한 기초가 된다.
그같이 튼튼한 기초 위에 세워진 삶은 어떤 역경의 바람이 불어 닥칠지라도 무너지지 않고 굳건히 서 있게 된다.
 반대로, 예수님의 가르침에 순종치 않으면 중대한 결과가 초래되는 것을 알 수 있다.
 마태복음은 그같은 점을 부각시키고 있다.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닺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마 7: 26- 27).
그같은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믿음의 생활을 어떻게 해야 할까?
 
마치는 글
 
예수님은 자기를 믿고 따르는 제자들에게 다른 사람의 유익을 주는 삶을 살라고 하셨다.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는 최선의 방법은 아가페의 사랑을 실천하는 삶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갖고 이기심 없는 마음으로 주님의 가르침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갈 때
우리는 아가페의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